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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감떫음 Sep 07. 2022

오롯이 '나'인 감사

고3의 어느 순간, 기록했던 글을 꺼내보았다

"그냐앙~그러니까..."

나는 그냥 앞만 보고 걸으며 어떤 말을 하든 듣고만 있었다.

아니, 듣고는 있었다.

그날따라 많이 피곤했는지 하굣길은 친한친구인 너와 함께여서 굳이 대꾸를 하지 않았다.

무미건조한 반응이었다.

"고마워."

친구의 얼굴로 시선을 돌렸다.

놀랐다. 놀란 거다. 그냥 그 말에, 내 심정에.

나도 너도, 서로를 보고 있진 않았지만 머쓱한 표정을 지었고 밤중에 부끄러운 공기가 흘렀다.

그 표정 끝엔 입꼬리가 올라가 있었다.


어떤 부탁을 들어줘서

무언가를 빌려줘서

도움을 주어서


흔히들 지나가며 습관적으로 내뱉는 '고마워, 감사합니다, 땡큐' 같은.

그 말을 어디서 어떤 일로 듣든 간에 나쁘게 들리진 않는다.

굳이

감사를 받을 일이 아닌 것 같은데?  싶어도

따지고 들 이유도 없다.


이 친구는 나와 아주 친하고, 거리낌 없이 편하고, 왠만한 건 숨기지 않는 사이다.

그런 나도 몰랐던 최근 친구의 고민거리.

혼자 슬퍼했던, 나도 눈치 못챘던 그녀의 내면.

어쩌다보니 혼자 울고, 그랬었다며 얘기를 해주는 너에게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없었다.


옆에서 알아채지도 못했는데,

나는 뒤늦게라도 그런 자신을 나에게 얘기해주었단 것에 고마워하고 있었다.


마침 수업이 한창 머리에 들어오지 않을 때, 문득 네 생각이 났다.

어딜가든 펜과 종이만 넉넉히 준다면 쥐어짜내서라도 가장 쉽게 할 수 있는 것이

나에겐 글쓰기였다.

그 순간 할 줄 아는 건 너에게 써주는 글 뿐이었다.


평소에 자주 읽고 알고 있던 에세이들의 가슴 따뜻해지는 짧은 어록 몇 가지를 조금 적었다.

지금 상황의 너가 위로받을 수 있는 내용에 맞는 걸로.


뭔가

이상했다.


이건 내가 쓴 글이 아니었다.

너를 위해 썼고, 널 생각하며 썼지만 정작 내가 직접한 것이 아니었다.

글이든 종이든 너무 많으면 또 시작도 전에 귀찮아지는 게 보통사람이었다.

그래서 작은 포스트 잇을 그 종이 위에 붙였다.

공간은 작았지만 내 말을 담는 데는 충분했다.

써둔 글들을 읽은 후 읽게 될 내 쪽지엔 그 글들에 대해 내가 너에게 덧붙여 해주고 싶은 말 몇 마디를 적었다.

뻔했다. 그냥,

난 그렇다해도 널 믿도록 노력할 것이며,

행복을 찾아나서는 건 너 혼자가 해야할 일이 맞지만 난 친구로서 옆에 있겠다느니,

남아서 너의 슬픔을 함께 등에 지고 가줄 수 있다라니, 그런.


그 짧은 종이를 곱고도 투박한 쪽지로 접어선 쉬는시간에 들고 찾아갔다.

다른 친구와 얘기를 나누고 있어 나도 아무렇지 않게 끼어들어 자연스레 같이 대화를 나눴다.

별 용무없이 심심해서 찾아온 것처럼 굴었다.

그러다 수업종이 치고 헤어지려하자 내심 낯간지러워하며 조용히 건네주었다.

아앜ㅋ, 또 뭐야아!

하는 넌 어떤 마음으로 그 글을 읽어줄까.

그러곤 3학년이 되면서 일주일 중 한 번 오는 같이 하교하는 길이었다.

편한 둘만 있으니 뭔들 못할 얘기가 있는가.


조심스레 네가 뜸을 들이며 어떤 말을 꺼냈다. 앞뒤 맥락도 전혀 맞지 않는 말을, 횡설수설한다. 그것이 뭔가를 말하고 싶단 뜻으로는 보였다.


매일을 아침부터 집에 도착할 밤까지,

남들에게 반응해주고 웃고 농담하고 장난치고 배려하고 들어주고...

무얼 위해 그리도 정신없이 지내는 지,

하루의 끝은 가만히 있는 것조차 지친다.


그런 날 아는 너이기에, 자연스레 이해해줄거라 본능이 그리 믿었나보다.

너가 그래주는 것이 아무렇지도 않게, 당연하단 듯 피곤하고 힘든 티를 내며 얘기를 듣는 둥 마는 둥 했다.

너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걸 알면서도, 참 너무했지.


그러던 나에게 너의 대뜸 '고맙다'란 말이 눈이 번쩍 뜨이게 만들었다.

평소 평범히 들어오던 '고맙다'가 아닌.

내가 호의를 베풀었기에 그에 맞는 (물론 그들에게도 그런 일에 감사의 말을 듣는 게 당연하단 뜻이 아니다)

고맙다를 듣는 것이 아닌.


내가 정말 진실되게, 진심으로 무언가를 위해 하고자 한 것에,

그것이 어찌보면 별 거 아닌 것이었음에도

내 사람이

정말 진실되게, 진심으로 믿음과 의지, 위로를 받았으며

그에 내 사람이 나에게 꾸밈없는 진정한

'감사'를 말해준다.


이 날 나는 그 한마디로 나의 감사의 근육을 뼈저리 느낄 수 있었다.

내 소중한 사람에 대한 내 책임감 같은 것을 더 느낀 것이 아니라

그런 피곤한 하루들을 보내던 나에게 얼마나 큰 위로가 되었는지를, 그리고 그 날들이 가치있었는지를.


소중한 사람일수록,

그 어느 것보다 최선을 다해 사랑하고, 소중히 하라.

그만큼의 행복이 고대에게 돌아올지어니.


그 날 받은 '고맙다'는

너가 아닌, 너뿐만이 아닌


나를 위한 감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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