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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감떫음 Sep 06. 2022

빗물의 크기

떫소리_2021. 6. 11

누가 손 씻고 창문에서 손을 탈탈 털어 떨어진 방울이 나한테 부딪히는 것 같은 짜증나는 빗물이라고, 바삐 걸어가며 말하자 친구는 비유가 너무 적절했는지 그 상황에 웃어댔다.

건대입구는 사람은 바글바글하고, 번쩍거려 눈부신 전광판에, 여기저기 가득 이어져있는 술집들로 붐볐다. 나와 친구는 그 인파를 뚫고 걸어가다보니 차츰 언제 그랬냐는 듯 조용해지는 골목이 드러났다. 겉을 보면 미용 샵처럼 생긴 bar에 도착했다. 아주 소박하게 생긴 작은 가게였지만 벽면으로는 각종 위스키들이 진열되어있고, 사장님이 가운데에 계신 오픈 주방에 둘러싸인 높은 의자들, 그렇게만 좌석이 있었다. 이미 어느 정도 기분 좋게 가신 남성 두분이 창을 등지고 계셨고, 한쪽에는 작은 벽걸이 TV에서 야구경기가 한창이었다.

나는 딱히 야구를 볼 것 같진 않았고, 사장님은 그걸 아셨는지 TV를 등지는 알맞은 자리의 의자를 매너있게 꺼내주셨다. 지친 몸으로 빽빽한 메뉴판을 읽자니 뭐가 뭔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지만, 애플 마티니와 마가리타를 고민하다 15도라는 마가리타를 선택했다. 안주는 모듬 소세지였다. 친구는 고민을 한참 하다 꽤 어려운 용어를 섞어쓰며 자신의 위스키를 주문했다. 전문적이라며 내가 유치하게 굴었다. 그냥 얼음을 섞어 위스키를 조금 부어주는 것뿐인데, 이런 데서는 그런 식의 용어를 쓰는게 통하나보다. 20대 초반들이 가기에는 많이 무거운 작은 bar였지만, 아저씨 감성을 가진 우리 둘은 썩 맘에 들었다. 마가리타의 색은 뉴질랜드의 에메랄드 바닷가 처럼 생겼다. 갑자기 더워지는 이 날씨에, 비가 부슬부슬 갑자기 내리기 시작했고, 전구 조명을 4개 정도만 켜놓은 작은 어두운 bar에서 청량한 색감을 맛보니 어딘가 속이 시원해졌다. 원래 술을 먹으며 이런저런 하소연을 하려고 했는데, 전시회를 다 둘러보고나니 bar에 가기엔 너무 이른 시간이라 중간에 들른 카페에서 밀크티 한잔씩 하며 얘기를 다 해버렸었다.

그래서 우린 그저 소소한 얘기를 즐겼다. 카페에서도 했던 주제였지만, 우린 자연스럽게 영화과에 얽힌 에피소드들을 꺼냈다. 나도 우리 학교 교수님 얘기를 꺼냈고, 얼마 전에 피드백을 받으며 혼났던 얘기까지 웃으며 안주가 되었다. 먼저 앉아 계시던 손님들도 나가고, 한동안은 우리 둘 뿐이었다. 가끔 사장님은 우리가 편하게 얘기할 수 있게 가게에 있다가도 나가서 비를 감상하곤 하셨다. 친구에게 가려져서 담배를 피시는 지는 의문이었다.

한참을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즐기다, 어느 새 가게는 단골들로 채워졌다. 나는 정신은 멀쩡했지만 확실히 몸이 취기에 핑핑 돌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고, 친구에게 내 귀를 보여주었다. 엄청 빨갛다길래 이제 가자, 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 사이에 이제는 진짜 내리는 비처럼 빗방울들의 양이 많아졌다. 그렇다고 방울 자체가 크진 않아서, 이번에는 위에서 분무기를 뿌리는 것만 같다고 농담을 했다. 친구는 여전히 웃으면서도, 내가 비틀거릴까봐 겁나서 빗길에서 잘 잡아주었다. 전날 밤에 강수량 퍼센트가 아주 낮아서 장난식으로 비오면 어쩌지, 했는데 친구는 투명우산을 들고왔었고, 설마 그걸 펼치게 될 줄은 몰랐다. 내 한 마디에 준비성을 갖춘 친구가 고마웠다.

우린 지하철역에서 각자의 방향으로 헤어졌다. 나는 많이 알딸딸했다. 꼭 이럴 때마다 생각나는 사람들한테는 무조건 연락을 한다. 친구와 얘기하면서도 나왔었던 말이었는데, 내가 너무 츤데레여서 표현할 수 있는 순간에 실컷 해야한다는 걸 나는 알았다. 아무래도 그런 이유로 술만 들어가면 보고싶은 친구들에게 연락을 거는 듯했다.

집에 도착하고, 처지는 몸으로 씻는 것까지 마친 다음, 시간은 아직 저녁 8시에서 9시로 넘어가는 중이었지만 저녁약과 취침약을 한 번에 털어넘기고는 블라인드까지 쳐서 조명을 모두 끄고 어둠 속에 쓰러졌다.

그냥 멍하니 누워만 있었다. 메세지를 보냈던 친구들 몇몇에게서 답장이 왔다. 그런데 읽고 답할 힘이 없었다. 아니, 사실은 그 연락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누군가 내가 연락할 때의 간절한 마음을 알아차려 줬으면 했다. 난 매번 우울할 때면 이렇게 친구들에게 문제를 던진다. 답을 덥썩 물고 나에게 오기를, 하는 바람. 얼마나 이기적인가.

그러다 친구 한 명이 오랜만에 전화를 걸어왔다. 누가 봐도 내 상태를 짐작하고 건 전화였다.

나는 자연스럽게 최근 있었던 일을 입에 담으려다 기다렸다는 듯이 눈물을 터뜨렸다. 그렇게 통곡하며 울게 된지, 일주일도 안되었다.

정말 좋은 소식이 있었는데, 선생님께서 내 상태가 많이 좋아진 것 같다며, 2주에 한 번씩 병원을 와보는 건 어떻냐고 제안을 하셨고, 한 번 해보겠다 다짐했다. 내 스스로도 그 변화를 느끼고 있었고, 선생님께 웃으며 며칠이 갈 지는 또 모르겠지만요, 라고 농담하며 병원을 나섰다.

이딴 부분에서만 늘 내 선견지명은 통했다. 그렇게 된 지 이틀도 못 지나서 이렇게 울음을 터뜨렸다. 조금 전까지 오던 빗줄기보다 내 눈물이 더 컸다.

한참을 울며불며 하다, 친구가 공감과 위로를 더해주며 이런저런 옛날 얘기를 하다가 또 웃음이 났다. 이런 상황에 웃음이 나오게 해주다니, 역시 내 친구였다. 그 힘이 얼마나 대단한 건지 스스로도 알았으면 한다. 항상 고맙다고. 항상 그 힘에 의지하게 된다고.

꽤 오랜 시간 동안 전화하다보니 어느 새 내 마음은 진정을 찾고 있었다. 기분 좋은 목소리로 끊었고, 나는 눈이 따가워 미칠 지경이었다. 머리가 어지러워 누워만 있는데 지나치게 많이 울어서 감기에 걸린 것처럼 코가 너무 막혔다.

동굴 앞에 커다란 바위를 막아놓은 것만 같이 막막했다.

억지로 코를 풀다가, 마침 또 다른 친구가 연락이 왔다. 목소리만 들어도 밝고 힘차서 바로 웃음이 나게 해주는 친구였다. 애써 잘 놀았냐며 시덥잖은 얘기를 던져주다 그래 쉬어라, 하며 전화를 끊었다. 짧은 안부 전화였지만 낮에 느꼈던 내 감정들은 어느 새 완전히 차분해졌다. 나는 골아떨어지듯 잠에 빠져 들었다.

하필 오늘 오전에, 일찍이 비대면으로 연기연습을 조원들과 하기로 했는데, 글쎄 조장인 내가 모든 걸 까먹고 잠만 자고 있었던 것이다. 화들짝 놀래서 죄송하다 하며 zoom링크를 켰지만 기다리다 다른 할 일을 하러 갔는 지 한 분이 돌아오지 않았다. 하필 딱 이 시간때쯤 연습을 하다 교수님께 링크를 전해드리며 피드백을 부탁하려 했었는데, 교수님께도 죄송하다며, 내일로 연습을 미루고 녹화해서 보내드리겠다고 전했다. 교수님은 어쩔 수 없지만 그래야겠다며 농담을 한두번 던지다 스케줄 떄문에 떠나셨다.

나는 다시 한 번 조원분들에게 죄송하다고, 정신이 없었다고 했다.

무슨 생각으로 술을 먹고는....울고는...그렇게 쓰러졌을까. 연습도 있는데. 내가 항상 열심히 사는 것 같다고 존경스럽다 해주던 조원들에게 너무 낯부끄러웠다. 당신들이 아는 나는, 사실은 이렇게나 쉽게 무너진다고.

예전보다 확실히 더 정신력이 약해진 것은 맞았다. 내 스스로도 뼈저리게 느껴졌던 그 힘.

그래도 나는 그 예전의 나를 훨씬 더 잘 알게 된 친구들 덕분에, 이렇게 무너져도 다시 일어설 힘을 찾는다. 금방 찾는다. 정말 단숨에 다시 일어날 정도로 빠르게 되찾는다. 세상 어딜 가야 이렇게 좋은 친구들을 남길 수 있는 걸까.

그저 문득, 한낮에 이 모든 일이 저번주의 일인 것처럼 느껴지는 감정에 친구들에 대한 사랑을 기록해두고 싶었다.

그들에게, 평생의 나의 축복을 전해주고만 싶다.

하늘에서 내리는 빗물은 어찌 못해도,

그들과 함께 공존하는 한 내 빗물은 언제든지 멈출 수 있고, 언제든지 아름다운 빗물로도 바뀔 줄 알았고, 무지개를 만들 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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