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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감떫음 Aug 09. 2022

初心, 이라 일컫는 것

떫소리_2021. 7. 22

"안녕하세요~!"

"응, 안녕~!"

탈색모를 하고 있던 귀여운 학생은 카페에서 타이머를 둔 상태로 무언가를 열심히 적고 있었다. 2시간이 지나자 일을 하고 있던 내 친구는 앞치마를 두른 채로 학생에게 가서 다정하게 "다 했어?" 하고 물었다. 우선 읽어본다며 학생이 머리를 배배 꼬며 열심히 써낸 원고지를 읽는다. 시원한 카페에서, 그 날 따라 글도 전혀 안 써지고, 그렇다고 게임만 하기에도 질리고, 지원해놓고 까먹은 사단법인 서포터즈에 1차 합격을 하는 바람에 zoom으로 2차 면접을 봤는데 망한 것 같고, 읽던 책을 보자기엔 집중도도 자꾸만 떨어졌다. 마침 심심했던 참에 지금은 카페도 한층 여유로운 거 같으니 친구에게로 갔다가 그 아이에게 관심을 가졌다. 과외를 하고 있는 친구가 제일 아낀다던 제자였다.

이제 20살이었고, 재수를 준비하고 있는 아이였다. 내가 옆자리에 자연스럽게 앉으며 우리는 인사했다.

보통 연하인 사람을 만나게 되도 먼저 높임말을 쓰고 봤는데, 보자마자 너무 친근한 아이였어서 나도 모르게 바로 말을 놓았다.

친구가 아이의 원고를 다 읽고 피드백을 해준 다음, 다시 한창 카운터로 들어가 일을 하고 있는 사이 남겨진 우리 둘은 당연하게도 영화 얘기로 대화를 시작했다.

막 며칠 전에 영화관에서 본 랑종과 블랙위도우 소감을 나누다 입시 상황을 얘기하고, 그리고 왜 글을 쓰고 영화를 하는 지 나는 조심스레 물었다. 그저 그런 물음이 떠올랐을 뿐이였다. 이 바닥에서 재수하기 정말 힘들텐데, 열심히구나, 할 만한 답변들을 들으면서, 난 그 친구의 이런저런 물음에 옛 추억 회상을 하듯 나의 19살 때의 이야기를 자연스레 얘기해주었다. 지금 보면 별 것도 아닌 거 같지만 그 아이에겐 당장에 내가 말해주는 내 이야기의 모든 것이 환상적으로 보였던 것 같다. 그렇겠지. 가고 싶은 학교에, 한창 목이 마르다 못해 타고 있을 시기일테니까. 그 아이를 보고 서로 얘기를 나누면 나눌수록 나의 어린 시절이 희미하게 비쳤다. 무언가에 저렇게 간절하고 열정적으로 미치던 시절이 있었다. 난 그 동생과 친해지면서 나의 초심을 어렴풋이 떠올릴 수 밖에 없었다.

친구가 퇴근하고, 내 자취방으로 이동하기로 해서 셋이서 카페를 나왔다. 바깥 공기가 텁텁할 정도로 더웠지만 하루 종일 에어컨 아래에 있다 나오니 오히려 따스하게 느껴졌다. 난 마지막까지 그 아이에게 마인드 컨트롤을 잘하라는 이런저런 조언을 해주고, 버스를 태워 보낸 후 친구와 저녁을 간단히 먹기로 했다.

간단...히였지만 막창에 소주 한 병을 까면서 이번엔 친구의 얘기를 이래저래 들었다. 우리 모두는 한 때 무언가에 집중하던 시기가 있었다. 가정 사정 같은 얘기를 나누다 역시 끝으로는 영화계에 영화인으로 남을 수 있을까, 하는 우리의 바램을 얘기했다.

나는 언제부터 영화를 좋아함을 넘어서 사랑했고, 존경했던 걸까. 그저 글만 혼자 끄적이던 나는 내가 문예창작과에라도 진학할 줄 알았다. 하지만 원서로는 단 두 곳만 넣었고, 나머지는 전부 극작을 하는 곳을 넣었다. 가장 가고 싶었던 학교가 시나리오를 중심으로 하는 지금의 학교였고, 나는 지금의 학교를 꿈꾸며 내 열정과 감정까지도 갈아넣었었다.

어느 순간부터, 영화에 대한 매력을 느끼면서 내 진로는 분야도 정해지지 않은 그냥 '글'에서 '영화' 라는 매체로 바뀌었다.

영화관에 들어가든, 어디서 어떻게 영화를 보든, 그 주어진 러닝타임 동안 우리는 한 영화의 세계에 빠져든다. 바깥의 물리적인 상황과는 선이 그어지는 순간. 그리고 그 간접적인 세계를 들여다보면서 우리는 제작자들이 표현하고자 하는 메세지와 배우들을 통한 감정을 맛 볼 수가 있다. 그런 영화로서의 기능이 좋았다. 이 학교에 오자마자 1학년 때 그런 식으로 영화를 좋아한다는 말씀을 하셨던 교수님도 떠올랐다. 당시 내가 그 한 마디 때문에 가장 존경하던 한예종 출신의 교수님이셨다.

예술적 창조는 발명이 지니지 못하는 인격적 감동으로 삶의 본원적 문제를 인식케 한다, 라는 말을 한 때 자소서 준비를 하면서 학교 홈페이지에서 발견했다. 그건 당시 내 스스로가 파헤치던, 내가 생각하는 예술창작의 본질 그 자체였다. 그리고 나는 그 의의에 가장 가까운 예술은 영화라고 판단했다. 나는 어느 순간부터 내 운명이 영화라고 여기며 공부했다.

그리고 그 꿈들을 가득 안고 서울 상경을 했고, 또 어느 순간부터 나는 얼마 가지 않아 초심 같은 것도 기억이 안나는 피폐한 사람이 되었다. 요즘은 왜 서울 사람들이 그렇게나 무기력하고 재미없게 사는 지를 알것도 같았다.

족히 2년, 그 짧다면 짧은 시간 동안 나는 현실 사회를 희생자로서 보고 느끼게 되었고, 발가락만 담굴 정도였던 영화계는 무서워졌다. 동화같이 아름다운 꿈이 무서운 현실로 변하는 건 아주 쉬웠다. 그 과정에 얼마나 많은 힘과 노력을 들었는 지도 상관없이, 한 번에 나에게로부터 등을 돌린다. 그리고 그걸 겪고 알게 된 지금의 나는 아직도 학생이며 꿈을 꾼다. 정확히 말하자면 꿈을 꾸고는 있지만 어떻게 할 줄은 모른다.

계속해서 나만의 색깔과 예술을 잃지 않고는 있다. 그것만으로도 다행이었다. 최근 들어 영화과를 갔다가 결국 마케팅 관련으로 전과하는 친구들의 모습도 보았다. 나는 아직까지 이렇게 남아있다. 꼭 영화를 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지만, 다른 할 것도 정말 많은 세상이지만, 왜 굳이 수명을 깎아먹으며 위험하고 답 없는 그곳에 욕을 내뱉는 일상이면서도 왜 내려놓지 못하는 걸까.

친구의 제자를 만났던 나는 내 초심을 오랜만에 떠올리면서, 그 때 그 시절의 '나'를 져버리지 못해서였다.

처음으로 그 무엇보다 더 열정과 노력을, 그것도 내가 단순히 '하고 싶어서' 라는 이유로 붙잡으려 하던 나.

나는 그렇게 열심히 벽을 올라 노끈을 잡는 데까지 왔다. 이제 로프를 잡고 절벽 위로 올라가면 나는 영화인이든 뭐든 간에 직업을 찾을 것이다. 하지만 로프를 스스로 끊어버리고 다시 다른 절벽을 찾아 나가는 내 옆의 동료들.

비교할 순 없지만 다른 절벽들이 그나마 끝이 보인다. 주어진 트랙을 도착까지 달리고 있는 사람들도 있었고,

사람은 굉장히 많은 광활한 광장 중앙에 떨어져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사람들도 있다.

나는 그 광장에 있다가 이제 무언가에 더 가까워지기 위해 한 절벽의 로프를 붙잡는 수준까지 왔다. 언제 이걸 놓을 지, 또는 절벽 위까지 올라가면서 다른 절벽으로 쉽게 옮길지는 전혀 모르겠다. 내 앞 날을 나 스스로도 아무것도 예측할 수가 없다. 나는 지금, 정확히 무얼 하고 싶은 걸까.

2차 면접으로 최종합격에서 결국 떨어진 서포터즈는 평소엔 관심도 없다가 그저 공고만 보고 대충 형식대로만 지원했었다. 뭐라도 해보자는 억지였었겠지.

초심. 초심이란 걸, 되찾을 수 있을까?

하지만 지금 다시 그 때의 초심을 잡는다 해도, 아마 예전같지는 않을 거다. 초심이 조금 다른 뜻으로 변형되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난 다시 지금의 초심을 만들어야 한다. 그래야 가까운 미래에, 로프를 붙잡고 더 올라간 나 자신이 힘에 빠져 대롱대롱 매달려만 있을 때, 지금의 새 초심이 등을 떠밀어 줄테니까.

그래,

나를 믿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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