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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하는 음악 - 쇼스타코비치 7번 교향곡
벨라 바르톡(1881-1945, 헝가리)이 지병이 악화되어 병실에서 투병 중일 때 라디오를 즐겨 들었다고 한다. 그때 우연히 흘러나온 곡은 러시아 작곡가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1906-1971)의 교향곡 7번 “레닌그라드” 1악장 부분이다.
이 곡의 1악장은 연주 시간만 무려 29분에 이르는 긴 곡이다.
심심하던 바르톡이 흥미진진하게 라디오를 청취하기 시작한 지 10여 분이 지났을 무렵, 그는 인내의 한계를 드러내고 역정을 내기 시작했다.
그를 자극한 건 곡이 지루하게 길어서가 아니었다. 다만 쇼스타코비치의 곡은 마치 모리스 라벨의 ‘볼레로’처럼 끝없이 반복되는 주제부가 진부한 악상이라 느꼈고, 더더욱 불쾌한 건 그런 못마땅한 곡을 송출하는 방송에 대한 불만이었다.
이후 불만을 토로하던 바르톡은 몸이 완쾌되어 병실을 박차고 나가자마자 작품을 내었는데, 그것은 그의 대표작 “관현악을 위한 협주곡”이었다.
재미난 점은 이 곡의 4번째 악장에서 등장한다. 여기에서 그는 보란 듯이 쇼스타코비치의 7번 교향곡의 주제부를 등장시켰다.
바르톡은 쇼스타코비치의 해당 곡을 다양하고 화려한 기교와 테크닉으로 변형시킬 수 있다는 걸 몸소 보이기라도 하는 듯, 현란하고 날 선 음악을 한껏 과시했다.
호불호가 갈리기는 하지만 사실 바르톡이 보여준 작품의 성과는 쇼스타코비치에게 한 수 가르쳐 주기에는 충분했을 정도로, 실로 대단하다.
그러나 자유로운 음악적 상상과 환경이 허락된 바르톡은 당시 쇼스타코비치가 소련 내에서 당으로부터 창작에 대해 얼마나 제한받고 핍박받는지 간과하고 있었다.
쇼스타코비치는 일찍이 18세 때 교향곡 1번을 선보여 소련뿐 아니라 전 유럽에서 주목받은 전도가 창창한 작곡가였다.
그는 탁월한 재능을 뽐내며 영화음악, 극음악, 오페라 “므첸스크의 멕베드 부인”, 발레음악 ‘황금시대’, ‘밝은 시냇물’ 등을 발표했다.
이때 당시로서는 혁신적인 재즈의 소재를 사용하거나 서방측의 전위 음악적인 요소를 적극 받아들이며 야심 찬 작품 활동을 펼쳐 나가고 있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쇼스타코비치의 음악적 재능은 30대에 이르자마자 공산당에 의해서 여지없이 꺾이고 말았다.
31살이던 그는 1936년 공산당의 기관지인 프라우다誌에게 “그의 전위적인 작품은 서방의 냄새를 풍기는 형식주의로서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따르지 않았으며, 부르주아적인 인민의 적이다”라고 매도당했다.
이때 쇼스타코비치는 숙청이냐 강제수용소행 이냐는 기로에 놓게 된 것이다.
음악 창작의 성향을 두고 생사에 기로에 서다니 기막힌 노릇이 아날 수 없는 일이었다.
내외로 따가운 시선을 받은 쇼스타코비치는 1년 뒤, 1937년에 사회주의 혁명 20주년 기념일에 맞취 교향곡 5번 ‘혁명’을 발표하고 나서야 비로소 당의 비판을 모면할 수 있었다.
일단 한숨 돌리기는 했지만, 1948년 소련 공산당 중앙 위원회의 소련 음악가 회의에서 지다 노프의 연설로 쇼스타코비치는 다시 한번 자기비판을 요구받는 위기를 맞이했다.
이후 쇼스타코비치는 더욱 위축된 음악적 범주 안에서 제한된 표현만이 가능한 상황에 놓이게 됐다.
어려운 상황에서도, 미련한 건지 우직한 건지 쇼스타코비치는 조국을 등지는 망명의 길을 선택하지 않았다.
그는 충분히 망명할 수 있었으나, 죽을 때까지 소련에 남아 그의 음악에 대한 당의 견해와 입장을 받아들였다.(그의 死後 아들이자 지휘자인 막심과 같은 이름의 손자 피아니스트 드미트리는 서방으로 망명했다.)
조국에 남은 쇼스타코비치는 자의건 타의건, 2차 대전 이후 서구 음악의 주류인 12음 기법이나 전위음악을 포기했다.
그로 인해 그가 선택한 길은 이미 철 지난 7 음계 기법을 쓸 수밖에 없게 되었다. 이 때문에 당대의 음악사를 정리하며 기술적인 측면에서 평가 유보되거나 평가절하 되는 게 사실이다.
더욱 충격적인 것은 국내에서 쇼스타코비치를 마음 놓고 들을 수 있게 된 건 그의 사후인 1980년대 중반부터 다. 아들 막심이 내한 연주곡으로 들고 오기 전까지 그의 음악은 이념과 사상의 장벽에 가로막혀 그저 소련 공산당 선동 곡을 만드는 나팔수 수준으로 곡해된 적도 있었다.
그러나 현대에 이르러서는 그가 처한 역경을 딛고 만들어 낸 음악의 내면에는, 공산당도 미처 간섭할 수 없었던 음악적인 언어가 숨 쉬고 있다고 평가하고 있다.
쇼스타코비치가 남긴 인간의 희망과 승리에 대한 확신의 메아리는 시대적 음악상의 굴레를 뛰어넘는 가치를 보여주며 음악 애호가들로부터 영원히 사랑받는 명작으로 빛나는 중이다.
그의 교향곡은 당시에도 서구에서는 상당히 인지도가 높았으며, 1980년 이후로는 국내에서도 많은 연구와 연주가 이루어지고 있다.
코로나와 경제 등으로 모두가 어려운 시기. 서글픈 현실을 불굴의 의지로써 창작활동을 펼쳐간 쇼스타코비치에 정신이 어느 때보다 절실한 이 시점에, 마음을 다잡으며 경의를 표하는 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