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의 조각을 모아 백범을 그리다

11.17 순국선열의 날을 기리며 - 백범일지 독후감

by 푸르름



책은 친구처럼 만나기도 하고, 연인처럼 만나기도 한다. 스치듯 가볍게 만난 적이 있는가 하면, 읽을수록 깊어지고, 여러 번 읽으면서 큰 깨달음을 얻은 책도 있다. 책꽂이에 꽂혀있는 빛바랜 책들은 나침반으로 내 삶의 방향을 가리킨다. 몇 차례의 이사에서도 버려지지 않았다는 것은 그만큼 나에게 소중하게 다가온 책이란 의미다. 그런 책 가운데 하나가 백범일지다.



백범일지를 처음 만난 것은 학교 강당에서 어머니들이 열은 도서 바자회에서였다. 장래희망으로 경찰을 꿈꾸던 난 김구 선생님이 초대 경무국장이란 선생님의 말씀이 생각나 조건 없이 백범일지를 골랐다. 하지만 1997년 초판 발행 후 ‘느낌표 책을 읽읍시다’라는 프로그램을 통하여 인기를 끌었던 도해순 주해의 이 책은 초등학생이 읽기에는 너무 난해했다. 당시 두꺼운 책 뒤 요약 편에 나오는 나의 소원 부분만 읽고, 세 번째 소원의 대답인 ‘나의 소원은 우리나라 대한의 완전한 독립이오’만 기억한 채 책을 덮었다.



백범일지는 10년이 지나서 얼룩지고 빛바랜 채로 시골 나의 책장에서 다시 나왔다. 그것은 같은 꿈을 꾸고, 포기하려는 상대를 응원하며 몇 년간 함께 공부하던 친구 덕분이었다. 경찰간부후보생 시험에 먼저 합격한 친구는 경찰대에서 개최하는 백범일지 독후감 대회를 준비하기 위해 백범일지를 읽고 글의 내용을 나와 토론하기를 원하였다. 그 모습에, 나도 언젠가는 합격하여 백범일지를 보란 듯이 한 장 한 장 소중하게 음미하며 읽고 싶었다. 그리고 시험에 붙어 김구 도서관에서 백범일지를 읽는 나를 상상하며 완독 하지 못한 백범일지를 다시 집어 들었다.

그러나 나의 이 희망은 끝이 보이지 않았다. 함께 아름다운 경찰을 꿈꾸던 친구들은 합격, 또는 진로 변경을 하였고, 집안이 어려운 친구들은 꿈을 접고 낙향하며 하나, 둘 사라졌다. 떨어질 때마다 한 번 더 도전하겠다는 나의 반복되는 말에 집에서도 지쳐 그만 포기하라는 말이 나왔다. 눈 오는 신림동 겨울에 잔뜩 웅크린 몸으로 혼자 컵밥을 먹으며 이제 그만 접을까도 생각했다. 눈물이 눈과 함께 떨어졌다.


몇십 년을 기다려도 빼앗긴 들에 독립의 봄이 오지 않았을 때 선생님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고통받는 나라의 독립을 기다리다 꽃잎처럼 사라져 간 수많은 동지들의 억울한 죽음 앞에서도 선생님은 어떻게 독립을 확신하고 희망을 품었을까? 그 답은 두 평 남짓한 방 독립정부 청사의 청소부를 희망했던 선생님의 꿈이 담긴 백범일지에 고스란히 담겨있었다. 4년을 떨어지고 난 그 밤 책을 정리하다가 난 다시 백범일지를 들었다.

백범일지 상권은 독립운동 한 길만을 바라본 백범일지 하권과 달리, 과거시험 준비생, 동학 접주, 양산 학교 교사 생활 등 다양한 삶이 뒤섞여 있다. 물론 내 개인의 인생 희망과 민족을 자주독립을 위한 선생님의 목적은 달랐지만, 선생에게도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할지 갈팡질팡하는 20대의 혼돈이 느껴져 더욱 공감하며 읽을 수 있었다. 4년 간의 공부로 지친 나에게 ‘몽우리 돌’이란 방향성을 잡아 주었다. 안악 사건으로 선생을 체포한 일제는, 심문 시 지주로서 전답에 몽우리 돌을 골라내는 것이 상례라며 죄가 없음에도 수많은 고문을 가하고 15년형을 내렸다. 이때 선생은 참으로 기쁘다며 ‘죽어도 몽우리 돌 정신을 품고 죽고, 살아도 몽우리 돌의 책무를 다하리라’ 굳게 다짐하였다 한다. 그리고 이 정신은 임시정부 수립 후 끝없는 내분과 일제의 공작에 의한 외부 난관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도록 도와주었다. 꿈을 향한 여정을 멈출까 하는 고뇌와 갈등의 시간마다 울며 읽었던 그 시간이 몽우리 돌이 되어, 나는 수험생활을 견딜 수 있었다.



길고 외로운 터널을 지나 경찰이라는 목표지에 이르고 나서도 백범일지는 이후의 여정을 향하여 나침반이 되어주었다. 합격이란 잠깐의 기쁨이 스치고 나서 ‘청년 경찰’의 길목에 이르자 나는 다시 헤매었다. 한 학기를 마치자 경찰대학이란 곳에서의 삶은 기대와 달리 나를 실망시키는 면이 적지 않았다. 학과 시간에는 지루함에, 일과 시간에는 나태함에 갈피를 못 잡고 우왕좌왕할 뿐이었다. 몽우리 돌 정신으로 마음을 다잡고자 했지만 방황하는 시간은 멈춰지지 않았다. 어떤 경찰이 되어야 할지 정확한 목표 없이는 훌륭한 경찰을 향해 나아갈 수 없었다. 그리고 그때, 거짓말처럼 백범일지를 꺼내게 한 독후감 대회가 또다시 나에게 다가왔다. 상권과 다른 답을 찾기 위해 이번에는 백범일지의 하권에 집중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그곳에는 합격이 전부가 아니라 향후 30년간 국민중심 인권과 안전하고 정의로운 사회를 위해 경찰이 무엇을 해야 할지에 대해 백범일지는 길을 안내해 주었다. 이는 그 유명한 한인애국단이나 8년 간의 유랑생활, 충칭 시대가 아닌 초등학교 6학년 때도 감명 깊었던 책 뒤편‘나의 소원’이 길잡이가 되었다. 백범 선생은 여기서‘우리는 개인의 자유를 힘껏 주장하되, 제 배를 채우기 위함이 아니라 제 가족을, 제 이웃을, 제 국민을 잘 살게 하기에 쓰이는 자유’를 제시해 주었다. 제 국민을 잘 살게 하기에 쓰이는 자유! 이것이야말로 제복 입은 시민이기도 한 경찰이 궁극적으로 도달해야 할 목적지가 아닐까? 시민의 자유를 최대한 보장하되, 개인의 자유가 다른 시민의 자유와 어우러져 잘 살도록 도움을 주는 것이야말로 신임 경찰이 가져야 할 기본자세이다. 그리고 그것을 깨닫게 되자 흐릿하던 항해 길이 뚜렷하게 눈앞에 보이는 듯했다.



끝으로 15~16세의 선생님이 스스로의 외모와 지식에 한탄할 때 ‘상서’에서 발췌한 ‘상 좋은 것이 몸 좋은 것만 못하고, 몸 좋은 것이 마음 좋은 것만 못하다’라는 구절로 항해의 돛대를 다잡은 걸 나도 따르고자 한다. 15년간 곁에 두며 이제야 그 깊은 내면을 처음 들여다본 인생의 두 번째 항해에 갈등과 외부 알력에 흔들리지 않도록 단단히 밧줄을 여며 본다. 마지막이라고 하는 순간 다시 희망을 보게 해 준 기억을 간직한 채, 비와 바람과 풍랑에 찢기고 쓰러져도 항로를 향해 다시 힘차게 노를 저으며 선생님이 말한 몽우리 돌처럼 묵묵하고 단단하게 앞만 보고 나아가고자 한다.


권력이 있다 하여 법 위에 서려는 자는 끝까지 법의 잣대를 통해 자유를 지키고, 힘없이 약한 자에겐 길잡이가 되어 자유를 최대한 누리도록 하겠다. 마음 좋은 경찰로써 대한민국의 경찰의 이름이 온 세상에 알려지도록 노력하는 경찰이 되겠다.

대한 독립 청사의 문지기가 되기를 원한 김구 선생님처럼.

매거진의 이전글연금이 효자중의 효자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