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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휘적휘적 Nov 16. 2023

약속의 땅에 울려 퍼져야 할 정의의 나팔

이스라엘 하마스 분쟁을 바라보는 성경적 시각

  이스라엘과 중동지역 무슬림 국가의 충돌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최근 발발한 이-하 분쟁은 지금까지의 그것들과 성격을 달리한다. 단순한 영토와 종교적 분쟁이 아니다. 정치·외교적 이해관계에 의한 하마스의 선제공격, 전례 없던 이스라엘의 피해는 지난 중동전쟁과 같은 흐름을 보장할 수 없게 만든다. 이와 같은 전쟁의 참상을 우리는 개혁주의 신학을 하는 신학도로서 어떠한 시선을 가지고 바라봐야 할까. 우리 안에 내재하고 있는 시오니즘과 실존적, 현실적 시선에서 탈피해 복음을 지닌 자로서의 시선으로 이 전쟁을 바라보고자 한다.


  끊이지 않는 폭력의 역사

  하마스가 이스라엘을 기습 침공한 지 한 달여가 흘렀다. 까삼 로켓 공습으로 이스라엘을 도발한 하마스는 곧장 지상군을 투입하여 민간인을 공격하고 납치했다. 2014년 7월 가자지구 분쟁 이후 9년 만에 벌어진 참극이다. 이에 이스라엘은 곧장 반격했으며 이로써 본격적인 전쟁이 시작됐다. 1973년 제4차 중동전쟁 이후 가장 큰 규모의 충돌이다.

  이번 전쟁에서 이스라엘을 충격에 빠뜨린 특이한 점은 지금껏 이스라엘은 중동 무슬림 국가들과의 전쟁에서 압도적인 승리를 거둬온데 반해 개전 초 선제타격을 허용했을 뿐만 아니라 민간인을 납치당하는 등 제4차 중동전쟁의 전체 사망자를 넘어서는 인명피해를 내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하마스를 둘러싼 헤즈볼라, 이란 등의 참전 여부와 함께 확전 우려가 커지고 있다. 특히 이전과 달리 이스라엘이 큰 피해를 입었다는 점, 선제 타격을 허용하고 민간인에 대한 보호가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점, 특히나 미국 시민권자가 납치당한 인질 가운데 있다는 점은 네타냐후 총리로 하여금 지상군 투입을 불가피하게 만들었고, 결국 현재 이스라엘 지상군이 가자지구에서 작전을 수행하며 이-하 간 전면전이 전개되고 있다.

  이와 같은 이-하 분쟁의 이해를 위해서는 하마스에 대해 짚어볼 필요가 있다. 하마스는 1987년 아흐메드 야신에 의해 결성된 단체다. 그들은 코란과 하디스(무함마드의 언행록)와 샤리아(이슬람 율법)를 기초로 하는 이슬람 원리주의 공화국 건설을 목적으로 한다. 이들은 초창기부터 굉장히 과격한 모습을 보였기에 이스라엘은 하마스를 통제할 필요가 있었다. 이에 이스라엘은 미국과 연합해 팔레스타인에게 경찰권을 허용함으로써 웨스트뱅크와 가자지구의 하마스를 통제하도록 한다. 이에 대한 대가로 팔레스타인은 1994년 자치권을 확보한다.

  그러나 자치권을 인정받음 팔레스타인 자치정부(파타당)는 이스라엘에 대해 소극적이고 안주적인 태도를 취하며 민심을 차츰 잃게 된다. 반면 하마스는 이스라엘에 적극 대항하는 모습을 지속함으로써 기존 팔레스타인의 중심 정당인 파타당을 이기고 2006년 총선거에서 승리한다. 이를 통해 하마스는 가자지구 통치권을 손에 넣고 지속적으로 이스라엘을 향해 도발을 이어오고 있는 것이다. 이스라엘 역시 이와 같은 도발에 압도적인 전력으로 맞대응하고 있다.

  이러한 분쟁이 멈추지 않는 이유는 이스라엘과 하마스 양측 모두 이와 같은 상황의 해결 지점을 폭력에서 찾기 때문이다. 더 큰 힘으로 상대를 압도해 불완전한 평화를 이루고자 함이 이 참상의 궁극적 원인인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폭력은 결코 문제의 해결로 나아갈 수 없다. 이 전쟁은 고대 이스라엘이 하던 여호와의 진멸 전쟁이 아니다. 폭력은 더 큰 폭력을 낳을 뿐이다.


  무의식에 잔존하는 시오니즘

  이스라엘이 이방 민족에게 침공 당하고 전투를 하는 것은 우리에게 익숙한 이야기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 이방 민족을 이기는 이야기 역시 익숙하다. 그렇기 때문에 이스라엘과 주변 중동 국가들의 전쟁은 전혀 낯설지 않다. 지난 네 번에 걸쳐 발발한 중동전쟁이 그 결정적 역할을 한다.

  그들의 명분은 양측 모두 분명하다. 이스라엘은 이천 년 전 로마에 의해 빼앗긴 약속의 땅을 되찾고자 함에 이 싸움의 이유가 있고, 팔레스타인은 갑작스럽게 빼앗긴 자신들의 영토를 되찾고 지키기 위함에 있다. 이와 함께 팔레스타인은 이스라엘이 들어오면서 가자지구와 웨스트뱅크에 강제이주 당한 채로 수십 년간 갇혀 지내왔다. 이스라엘에 대한 분노가 클 수밖에 없는 상황인 것이다. 이외에도 복잡다단한 국제정세와 종교적 이유, 외교적 문제가 산재하고 있어 갈등 완화로 가는 길이 쉽지 않다. 또, 오슬로협정 이후로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분쟁이라기보다 이스라엘과 하마스 사이의 분쟁이 된 형국이다.  

  이와 같은 전쟁이 발발하면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을 이분화해 왔다. 성경에 나타나는 이스라엘을 선으로, 기독교를 박해하는 무슬림 팔레스타인을 악으로 말이다. 때문에 이스라엘이 예수를 믿는 개신교와 전혀 다른 길을 걷는 국가라는 것을 알면서도 이러한 상황에서는 무의식중에 이스라엘의 입장에 서게 되는 것이 우리의 불편한 현실이다.

  우리의 우방 미국이 지원하는 이스라엘에게 더 친근한 감정을 갖게 되는 것 역시 우리가 이 분쟁을 잘못된 시선으로 바라보게 만드는 요인이다. 또한 팔레스타인의 전신을 블레셋으로 여기며 구약 시대의 이스라엘 블레셋 간 갈등과 연결 지으며 이스라엘의 승리를 바라는 시선도 적지 않다. 그러나 현재 팔레스타인은 2,000년 전 로마가 유대인들을 추방할 때 유대인이 가장 싫어했던 민족인 블레셋의 이름을 그들의 땅에 붙인 것에 연유한다. 다시 말해 팔레스타인이라는 이름의 어원은 블레셋이 맞으나, 민족적 정체성은 아무런 연관이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많은 이들이 이 분쟁을 이스라엘과 블레셋, 선과 악으로 구분하는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백 투더 이스라엘(Back to the Israel)”을 주창하며 다윗과 솔로몬 시대의 영광을 되찾고자 하는 현재 이스라엘의 시오니즘이 우리 안에도 은연중에 내재되어 있음을 확인한다. 성경의 무지에 기인하는 시오니즘이 우리 안에 들어와 있다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이-하 분쟁을 바라보는 불완전한 시선

  이 싸움이 지난하게 이어지는 단계로 진입한다면 그들이 내세우는 명분은 퇴색할 것이다. 지금껏 전투 양상을 길게 가져가지 않고 도발과 진압, 짧은 무력시위 정도의 수준으로 이어온 것도 그 이유일 것이다. 타협의 여지가 없는 지속적인 대립과 갈등 상황에서 어느 한 쪽의 편을 든다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세속 언론에서는 한 쪽의 상황을 집중적으로 보도한다. 국가적 외교 기조와 국제사회 흐름, 자사에 대한 이익 등을 철저히 따져 가며 기사의 방향을 잡아 나간다. 헤드라인은 보다 자극적이고, 내용은 실리를 추구한다. 물가와 유가 상승, 경제적 침체와 금리 상승. 이것들은 세속 기사를 보며 많은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생각하고 걱정하는 것들이다. 민족의 갈등과 수많은 생명이 걸린 일에 당장 닥쳐올 손익을 계산하며 우려의 시선을 가지는 것은 죄악 된 이 사회의 처참함이다.

  일각에서는 생명의 존엄, 전쟁의 폭력성과 같은 인권 문제로만 바라본다. 언뜻 보기에는 인도적 차원에서 같은 인간으로서 마땅히 지녀야 할 태도처럼 보인다. 이와 같은 시선이 윤리적으로 그르지도 않다. 그러나 인본주의에 기인하는 이러한 시선은 지속적인 갈등 상황을 해결하기에는 분명한 한계가 있다. 근본적인 해결 지점에 대한 고민의 선행이 되지 않은 인본주의적 시선은 문제 제기만 할 수 있을 뿐, 어떠한 해결책도 제시할 수 없다.


  약속의 땅, 회복되어야 할 사랑과 정의

  신학을 공부하는 자라면, 그 전에 진정한 성도라면 이 전쟁을 위와 같은 시선으로만 바라봐서는 안 된다. 보다 나아간, 절대적 진리를 지닌 하나님의 말씀, 성경에 입각해 이-하 분쟁을 들여다봐야 하는 것이다. 어찌 할 수 없는 폭력의 시대에 살아가야만 한다면, 그 속에서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으로 평화와 안식을 찾아야 한다.

  먼저는 성경의 목적이다. 성경은 복음을 선포함으로써 궁극적으로 은혜적 구원을 천명하며 이웃 사랑을 명령한다. 이것을 먼저 생각해야 한다. 인류의 역사는 전쟁으로 점철되어 있다. 역사가 개창한 이래 인류는 폭력에 노출되어 있었다. 개인의 일상 속에서 벌어지는 작은 폭력부터 가장 거대한 규모의 것 민족과 민족 간 일어나는 전쟁까지, 그 양상은 굉장히 다양한 모습을 보여 왔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이를 정면으로 부인하는 ‘사랑’을 명령한다. 문제의 해결에 있어서 힘과 힘의 대결, 즉 폭력이 아닌 이웃에 대한 지극한 사랑을 보이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보이신 십자가 사랑이 바로 그것이다. 인류는 아담의 원죄 이래 하나님과 원수 된 죄인의 위치에 놓여 있었다. 그런 인류를 사랑하신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심으로 모든 죄를 짊어지게 하셨고, 예수님은 기꺼이 순종하셨다. 그로 인해 인류에게는 구원이라는 은혜와 새 생명이 주어졌다.

  그런 사랑을 보이신 예수님이시기에 원수를 사랑하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라고 담대히 말씀하신다(마5:44). 뼈가 부서지고 살이 찢기며 생명이 산화하는 것 같은 고통을 감내하는 것이 바로 원수 사랑이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몸소 보이신 것이다. 그러나 그 사랑으로 인해 인류는 참된 평안과 생명을 얻었고 하나님과의 화평을 이룰 수 있게 되었다.

  현재 이스라엘과 하마스에게 필요한 것은 분명히 사랑이다. 그들의 분쟁은 사랑에 수반되는 뼈가 부서지고 살이 찢기며 생명이 산화하는 고통이 뒤따르고 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어떠한가? 사망과 증오, 깊어져만 가는 갈등이 아닌가? 가자지구를 향한 포위 공격 속에 수천이 넘는 생명이 빛을 잃었고 하마스에 잡힌 이스라엘 인질은 많은 이들 앞에서 처참하게 처형되었다.

  하마스를 지지하는 헤즈볼라와 이란은 언제라도 전쟁에 뛰어들 의지를 보이고 있으며, 여태 쌓아온 이스라엘과 무슬림 국가 간의 평화도 더 이상 지속되기 어려운 지경에 놓였다. 양측 모두 비윤리적인 전투 양상으로 국제 사회에서 규탄의 대상이 되고 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약속하시고 친히 이끄셨던, 그리고 예수님께서 지상에서 살다 가셨던 그 축복의 땅에서 이 같은 아비규환의 상황이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사랑이 부재한 곳에는 폭력과 사망이 있을 뿐이다. 그렇기에 그들 모두에게 복음의 선포가 필요하다. 예수님께서 보이신 원수를 향한 철저한 사랑, 폭력 앞에 폭력으로 대응하지 않으며, 죽어짐으로 증명하는 상대에 대한 완전한 사랑이 그것이다. 이상에 가까운 이야기일지 모르나, 전쟁이라는 폭력 앞에 무력하게 죽어가는 이스라엘과 하마스 모두 복음이 필요한 존재인 것이다.

  또한 성경을 관통하며 우리에게 다가오는 또 하나의 메시지가 바로 정의이다. 복음이 약속의 땅에 새로이 심겨지는 나무라면, 정의는 그 나무에서 열릴 열매다. 복음이 선포되는 곳에는 하나님의 성품과 그 공도가 드러나야 한다. 팀 켈러는 자신의 저서 『팀 켈러의 정의란 무엇인가』에서 하나님의 정의에 대해 ‘체데크’와 ‘미쉬파트’로 구분한다. 먼저 ‘체데크’는 일상을 가능케 하는 기초 정의로 본다. 이웃과의 관계에 있어 마땅히 행해야 할 것들이다. 가족 관계를 비롯한 사회적 관계를 공정하고 공평하며 관대하게 가져가야 하는 것이다. 나아가 이웃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손님을 환대하며 부모에게 순종하는 것을 포함한다.

  다음으로 ‘미쉬파트’는 불의에 대한 교정을 명령하는 교정 정의로 본다. 법적 기준에 따라 벌을 내리고 부당한 일을 당한 희생자를 보살펴주는 것을 뜻한다. 미쉬파트로 인해 죄로 깨어진 세상의 정의를 다시금 실현할 수 있고 더 나은 사회를 세울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정의는 앞서 언급한 대로 하나님의 성품이며 인류가 따라가야 할 하나님의 공도이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류는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가며 그의 도를 행해야 할 의무가 있는 것이다.

  현재 이스라엘과 하마스 사이의 정의는 무너져 내렸다는 표현이 무색할 정도로 처참한 지경이다. 골이 깊어질 대로 깊어진 이-하 분쟁의 중단과 회복은 어쩌면 요원해 보이는 일일지 모르겠다. 그러나 인간적인 최소한의 윤리조차 지켜지지 않는 곳에 마땅히 필요한 것이 하나님의 성품, 즉 하나님의 정의다. 전쟁 속에서 기초적인 정의가 실현되는 것은 불가능하다. 정상적인 사회적 관계를 형성할 수 없는 곳, 불의와 폭력이 난무하는 현재의 가자지구에는 하나님의 정의, 즉 사회 정의의 회복이 반드시 필요하다. 다친 자를 보살피고 잃은 자에게 물질과 식량을 나누는 일, 도움이 필요한 자를 결코 지나치지 않는 것,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성품을 드러내고 나아가 하나님의 통치를 선포하는 것이다. 무너진 정의를 다시 세움으로써, 죄로 물든 세상을 구원으로 이끌어 가시는 하나님을 따라가야 한다.


  개혁 신학을 하는 우리는 그리스도를 세상 가운데 드러내며 살아가야 하는 존재다. 따라서 이-하 분쟁을 바라보는 시각 역시 개혁주의 복음에 입각해야 한다. 국제적, 사회적 현안이나 실존적 문제가 아닌, 진리의 문제로 봐야 하는 것이다. 그들에게 복음이 어떻게 선포될 수 있을 것인가, 하나님의 사랑이 그들 사이에서 어떻게 세워질 수 있을 것인가를 놓고 부단히 고민하고 치열하게 기도해야 하는 것이 개혁주의 신학도의 사명이다. 치열함 끝에 선포되는 정의와 복음만이 이-하 분쟁을 끝맺고 진정한 평화의 시대를 열 것이다.

  이스라엘은 정의를 회복함으로써,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그 자식과 권속에게 명하여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려”(창18:19) 한다는 명령을 속히 수행해야 한다.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감으로써 지난날 실패했던 하나님 나라 건설과 확장 현장에 뛰어들어야 한다. 또한 이스라엘과 하마스, 나아가 무슬림 국가 간의 관계가 복음으로 회복되어야 한다. 이웃을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이 그들 외교의 노선이 되어야 할 것이며, 이를 통해 진정한 평화를 이뤄야 할 것이다. 이 땅의 회복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 성경에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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