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혜원 Sep 14. 2020

가족의 입과 귀를 자를 수 있나요?

반려견 단미 단이의 불필요성을 직면할 때

집에서 30분은 걸어야 나오는 공원은 내 ‘최애’ 장소다. 거리가 꽤 있어서 삼순이(반려견 진도믹스) 산책이 아닌, 주로 혼자 운동할 때 찾는다. 굳이 이곳까지 오는 이유는 단 하나. 많은 강아지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근처에 아파트가 많아서인지 온 동네 개들은 죄다 이곳으로 모인다. 코로나19로 인해 산책하는 강아지들이 별로 없을까 염려했는데 기우였다. 평소보다 더 많은 인파가 몰린 듯했다.     



공원에 도착한 것만으로도 꽤 조깅을 한 셈이었다. 숨을 고르며 강아지들을 구경하기 시작했다. 우리 집 누렁이도 남부럽지 않게 키운다고 자부했는데, 형형색색의 용품을 휘둘러 감은 강아지들이 많았다. 반려인구 1000만 시대에 걸맞은 광경이었다. 내가 그렇듯, 이곳에 모인 반려인들도 본인의 반려견을 자식처럼 바라보고 있었다.     



각기 다른 웰시코기 꼬리 형태의 예_온라인갈무리

수많은 인파 속, 웰시코기 무리가 보였다. 바짝 선 귀와 큰 눈망울은 진도믹스인 삼순이를 닮았는데, 짧은 다리로 재빠르게 달리는 모습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졌다. 사랑스러웠다. 그렇게 망부석이 되어 한참을 구경하는데,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분명 짧은 다리와 얼굴은 똑같이 생겼는데, 엉덩이의 모습이 다 달랐다. 어떤 아이는 전형적인 웰시코기 엉덩이처럼 꼬리가 아주 짧았고, 어떤 아이는 아예 꼬리의 흔적을 찾을 수 없을 정도였다. 또 다른 아이는 삼순이처럼 두껍고 긴 꼬리를 갖고 있었다. 혼란스러웠다. 당연히 긴 꼬리를 가진 게 원래의 모습일 텐데, 웰시코기로서는 어색했다. 더 구경할 수 없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머릿속이 복잡했다. 긴 꼬리의 웰시코기가 낯설었던 순간의 내 감상을 곱씹었다. 그렇다. 웰시코기는 원래 길고 두꺼운 꼬리를 갖고 있지만, 단미 수술을 워낙 많이 시키다 보니 나도 모르게 짧고 동그란 꼬리에 익숙해진 것이었다. 각기 다른 꼬리 모습으로 추측하건대, 애초에 단미가 되어 펫샵에 유통되는 경우도 많을 것 같고 원래의 모습을 굳이 단미 시킨 견주들도 많으리라 짐작이 됐다. 헛웃음이 나왔다. 이따금 해외토픽에서나 견주 욕심으로 성형 수술을 감행한 강아지들을 접했었다. 비인간적이고 폭력적이라고 온갖 욕을 해댔는데, 따지고 보면 무차별적인 단미도 강아지 성형에 속했다. 도베르만의 단이 실태를 접하고 받았던 충격이 되살아났다. 도베르만의 귀는 원래 접혀 있다. 그런데 이를 세우는 것도 모자라, 이발하듯이 모양을 더 작고 날렵하게 다듬는 나쁜 견주들이 많다.      

원래의 도베르만은 접힌 귀를 가지고 있다.


나에게 개는, ‘입’이 있지만 없는 존재다. 그들에게 입은 신체적 구조에 불과하다. 단지 짖을 수밖에 없으며, 사람처럼 말을 할 수 없다. 우리는 그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어떤 고통을 얼마나 느끼는지 예측할 수 없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고통을 가해야 한다면, 그것은 최소화하는 게 당연하다. 단미, 단이는 불필요한 고통이다. 그들의 의사를 알 수 없는 한, 이 모든 것은 ‘폭력’에 불과하다. 특히 개는 꼬리를 통해 감정표시를 하므로, 단미는 개의 마지막 사회적 소통 기능을 박탈하는 행위인 셈이다.      



2년 전, 반려견 중성화 수술 당시 고민이 많았다. 인위적으로 생식 기능을 막는 게 정당한 일인지 판단이 안 섰다. 노견이 됐을 때 합병증을 막을 수 있고, 더 건강한 견생이 가능하다는 다양한 장점이 있었다. 결국 삼순이는 중성화 수술을 받았다. 그때의 선택에 후회는 없으나, 삼순이 중성화 수술은 내게 커다란 죄책감으로 남아있다. 그 이유는 삼순이는 본인 몸에 대해 일체의 선택권을 가질 수 없었기 때문이다. 오로지 내 판단에 의해, 삼순이는 생식 기능을 잃었다.           



우리는 개를 ‘가족’이라 칭하는 시대를 산다. ‘개’라는 표현은 거칠게 느껴지고 ‘반려견’이 익숙한 사회가 되었다. 그 어떤 누구도 내 가족이 불필요한 고통을 받는 것을 원치 않을 것이다. 특히나 그 구성원이 말을 못 하는 경우라면 더더욱 그렇다. 반려견이 정말 우리의 가족이라면, 그들의 꼬리와 귀를 자르는 행위는 멈춰야 한다. “남들이 다 해서, 더 멋지고 귀여워 보여서”. 이게 단미 단이의 합당한 이유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당신은 반려견을 키울 자격이 없다.           

작가의 이전글 육식을 줄이자는 주장, 공허하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