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치지 못한 편지

by 가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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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의 끝자락. 장대비가 퍼붓다가도 언제 그랬냐는 듯 햇빛이 다시 내리쬐는 나날들이야. 습기를 머금은 공기 사이로 빛이 부서지고, 나뭇잎들 위로 빗방울이 맺히는 여름날. 요즘의 나는 말이야. 뭐든 시작할 수 있을 것만 같던 한여름 같던 마음을 잠시 잃어버렸어. 비 온 뒤 고인 물웅덩이 위로 햇살이 스치면 반짝 빛나는 신기루처럼 스르르 사라져 버렸어. 언젠가 다시 무언가를 기대해도 괜찮다고 믿어볼 수 있는 날이 오길 바라며, 홀로 조용한 여름의 중턱에 서 있어.


무덥고 나른한 퇴근길.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늘 마주치는 우편함이 있어. 우리 집은 같은 층 사람들과 하나의 우편함을 함께 쓰다 보니, 의도치 않게 다른 사람들의 우편까지 함께 보게 되거든. 이번 달의 카드값이 적힌 명세서, 세금을 알리는 딱딱한 고지서 사이에 이따금 알록달록한 편지들도 보여. 어여쁜 우표까지 정성스럽게 붙여진 편지들 말이야. 그 편지들은 내가 이사 온 날부터 지금까지 언제나 그 자리에 있어. 그 누구에게도 읽히지 않은 채로. 보낸 사람만 있을 뿐 받은 사람은 없는 채로.


수신인이 이사를 갔을 수도 있고 애초에 잘못된 주소로 편지를 부쳤을 수도 있지만, 끝내 전해지지 못하는 편지들을 바라보다가 오늘은 괜히 쓸쓸해졌어. 아마도 그 편지들은 영원히 도착하지 못한 채 그 자리에 조용히 남아 있겠지. 오랜 시간 누군가를 기다리면서. 누군가 한 글자, 한 글자에 마음을 담고 예쁜 우표를 붙였을 때, 진심이 편지로 태어나는 순간은 참 빛났을 텐데. 어떤 이의 진심은 부쳤지만 부치지 못한 것과 다를 바 없는 종이묶음이 되곤 해.


그 편지들이 마치 나 같아서인 걸까. 나는 습관처럼 보내지 못한 편지를 마음속으로 써왔으니까. 모든 말을 기꺼이 꺼내어 들려줄 수는 없으니 어떤 마음은 삭이고 또 삭여서 나만의 우체통에 가두어 놓곤 했으니. 시절만을 함께하고 이젠 더는 볼 수 없는 사람들에게 보내는 비밀스러운 문장들. 이제는 눈을 마주치고 귀 기울이며 마음을 속삭일 수 없기에 혼자서만 끄적일 수밖에 없는 낱말들. 인연이 지나간 자리엔 늘 몇 장의 편지가 남아. 어느 날은 미움을 담고, 어느 날은 용서를, 사랑을, 아쉬움을, 어느 날은 후련함을 담아내곤 해. 담긴 내용과 감정은 계속 바뀌지만 그 편지를 계속 써나가. 도착할 곳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누구에게도 닿지 않을 그 편지를 계속해서.


전하지 못할 말들이 내 안에 편지처럼 하나둘 쌓이면 어느샌가 문득 부치고 싶어 질까. 때론 어떤 말들은 끝내 전하지 않는 게 나을 때가 있으니 그저 조용히 삼키는 게 좋겠지. 당신과 함께한 그 시간들을 무척이나 그리워했어요. 강한 척했지만 사실 당신도 알잖아요. 난 그다지 강한 사람이 아니라는 거. 자꾸만 나아가지 못하고 과거의 시간을 붙잡아둘 때면 끄적이던 솔직한 마음. 이 세상 어떤 편지도, 어떤 마음도 외롭지 않았으면 좋겠다, 말도 안 되는 소망을 품고 잠이 드는 오늘 밤. 친구야. 잘 자. 내일이면 나 다시 조금 더 내일을 살아가볼게.


비가 오는 어느 밤,

네 친구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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