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이맘때 쓴 편지가 우편함에 도착했어. 봉투를 열자 오래된 계절의 바람이 스민 듯, 2024년의 내가 불쑥 눈앞에 서 있는 것 같았어. 그날은 개천절이었고 나는 제주에 있었어. 한창 몸이 아팠을 때라 고장 난 몸을 이끌고도 괜히 마음만은 달리려던 시절. 빨리 뛰는 심장 때문에 멀리 가지 못하고, 그저 조용한 카페 구석에 앉아 음악을 들으며 글을 쓰던 시간. 힘겹기만 했던 그 시절도 이제는 고요하고 아름답게만 기억되네. 나는 그날 1년 뒤의 나에게 편지를 썼고, 그 편지가 오늘의 내게 도착한 거야. 오지 않을 것만 같던 시간이 이렇게 또 흘러서. 편지 속 몇 줄을 이곳에 남길게.
가은아, 그때의 가을은 어때?
이맘때쯤의 나는 성장통을 겪고 있어. 사춘기도 아닐 텐데 말이야.
몸이 아프니 마음속엔 괜한 억지스러운 투정만 늘어가.
낯설고 새로운 일들을 두려워하기보단 설레어하는 너였는데, 어떤 것들은 희미해져 가.
내가 없는 1년 동안 그 무엇에도 온전히 기대지 못한 채 혼자 견뎌야만 하는 시간이 있었겠지만,
넌 결국 더 단단해지고, 더 빛나는 어른이 되었을 거야.
지금보다는 조금 더 건강 해졌을 테고 새 회사에서도 자리 잡아가겠지.
마음에 들지 않는 몇 군데의 순간이 있었을지라도 너에겐 결국 좋은 순간들이 더 많이 찾아갈 거야.
널 진심으로 응원하는 내가 있어. 잊지 마.
다행히도 지금의 나는 1년 전 내가 그토록 바라던 대로 다시 건강해졌고, 새로운 자리에서도 뿌리를 내려가고 있어. 하지만 그 과정은 늘 경계와 두려움 속에 있었지. 또다시 아파질까, 또다시 무너질까. 작은 흔들림에도 아픈 기억이 밀려올까 봐, 고슴도치처럼 가시를 세우고 연약한 속살을 감추느라 하루하루가 전투 같았어. 많은 것을 되찾고 또 얻으려고 매 순간 애써야만 했어.
진심에도 총량이 있는 게 아닐까 싶어 마음을 아껴왔던 시절. 이윽고 다 써버리면 정작 줄 게 남지 않을까 두려워 쉽게 꺼내지 못했어. 마음에 공간을 좁히고 경계하고 불안해하느라 바쁘던 시간들. 하지만 돌아보니 진심은 아낌없이 줄 수 있을 때 비로소 의미가 있는 것이더라. 하나도 아까워하지 않고 나누어 줄 수 있는 마음이 내게 아직 있다는 것, 그것 자체로 얼마나 아름답고 안심이 되는 일인지. 아직 나 아닌 무언가에 아파하며 눈물 흘릴 수 있고 소중해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축복인 일인지 이제는 알 것 같아.
이제는 마음에 조금 더 넓은 공간을 내어주려 해. 오래 붙잡은 것들은 최선을 다했으니 고이 보내고, 새로운 것들이 스며들 자리를 남겨두려고 해. 나 자신이 다시 아플까 봐, 다시 상처받을까 봐 늘 경계하고 불안해하며 진심을 주는 일에 겁을 냈다면 이제는 그러지 않으려고. 더 가치 있고 사랑스러운 것들이 내게 무사히 도착할 수 있도록.
좋은 글을 읽고 진심이 담긴 글을 써야지. 주변을 하나하나 돌아보며 다시 그들을 빛내고 아껴줘야지. 공간과 여백이 생긴 만큼 매 순간 나답게 빛날 수 있도록 스스로를 사랑해야지. 더 좋은 사람이 되어 내 진심을 감사해하고 축복으로 여길 가치 있는 사람을 기다렸다 아낌없이 사랑해야지. 내가 진심일 수 있게 해 주었던 모든 기억과 경험을 인생의 한 페이지로 고이 간직하고, 이제 나는 비워둔 자리를 더 좋은 것들로 채워가야지.
안녕, 지난 1년의 모든 것들아. 두려움 속에서도 또 많은 것을 배우고 얻었으니 결국 행복했어. 슬프고 외롭던 기억을 인생의 한 계절로 조용히 실어 보내고, 나는 또 다음 계절로 걸어갈게.
2025년 개천절,
널 가장 사랑하는 네 친구로부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