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의 색으로 물들어가는

by 가은

네가 제일 좋아하는 계절, 가을의 초입이야. 모든 것이 서툴던 때를 거쳐 서서히 익어가고 마침내 열매를 맺는 계절. 조금만 더 시간이 지나면 선선한 가을바람이 코끝을 간질이겠지. 그 바람은 마치 그동안 따가운 햇살을 견디며 무르익느라 고생 많았다고, 수고했다는 인사를 전해주는 것만 같아.


요즘은 사람의 감정이 얼마나 쉽게 물드는지 자주 느끼곤 해. 며칠 전 퇴근길이었어. 하루 종일 지쳐 무표정으로 엘리베이터에 서 있었는데, 옆에 있던 동료가 환하게 웃으며 “오늘 정말 고생 많으셨어요” 하고 인사를 건네더라. 그 순간 마음이 스르르 풀리고, 나도 모르게 미소가 번졌어. 감정이 이렇게 번지고 물드는 거구나, 새삼 느낄 수 있었던 순간이야.


또 어떤 날엔 길거리에서 아주 사소한 친절을 목격하기도 했어. 버스에서 자리를 양보하는 모습을 본 다른 사람이 또다시 누군가에게 자리를 내어주는 순간. 작은 배려가 연쇄처럼 이어지는 장면을 보고 있으면, 마음이 괜히 따뜻해지고 세상을 더 다정하게 만들고 싶다는 다짐이 피어오르곤 해. 반대로 아픈 상실을 마주해야 하는 순간도 있었어. 장례식장에 갔을 때였는데, 가족 중 한 사람이 무너져 울음을 터뜨리자 그 자리에 있던 낯선 사람들까지 조용히 눈물을 훔치더라. 상실과 아픔이 공기처럼 퍼져 결국 그 공간에 있던 모두의 가슴을 물들이는 것 같았지.


그런 경험들이 쌓이다 보니 문득 고민하게 되더라. 나는 과연 누군가에게 좋은 감정만을 전하며 살아왔을까. 돌이켜보면 지난날 받아왔던 사랑을 누군가에게 아낌없이 주며 물들이기도 했지만, 어디선가 받은 상처로 인해 아무 상관도 없는 사람에게 날카롭게 굴었던 순간들도 있으니까. 상처가 또 다른 상처로 이어지는 건 정말 막기 힘든 일이더라. 그러지 말아야지 다짐하면서도 엉뚱한 사람에게 물들이고 마는 일은, 돌이켜보면 가장 쓰리고 아픈 기억 중 하나가 되고 말았지.


사람은 결국 받았던 마음과 감정을 다시 전하는 존재인 것 같아. 누군가는 분홍빛 사랑을, 또 누군가는 회색빛 상처를, 그렇게 서로에게 번지고 스며든 채로. 다양한 감정의 색이 뒤섞여 세상은 물들어가고 그 속에서 우리는 함께 살아가는 것 같아. 물론 때로는 소중한 것을 잃고 슬픈 일을 겪어야만 하는 게 세상이지만, 결국은 그 안에서 사랑을 나누고 다정함을 물들이며 살아가는 시간이 더 많았으면 해. 상처조차도 결국 우리의 일부라는 걸 받아들이면서 모두가 더 자주 행복할 수 있었으면.


그러니 잊지 말자. 네 환한 웃음이 누군가의 하루를 바꿀 수 있고, 네가 흘린 눈물도 또 다른 이의 마음에 닿아 위로가 될 수 있다는 걸. 세상은 그렇게 서로 물들며 이어지고 있다는 걸. 타인에게 받는 위로와 사랑을 당연시하지 않고 감사하며, 내 상처를 너무 아픈 방식으로 전하진 않도록 주의하며 이 아름다운 가을을 보내자.


2025년 9월의 시작,

네 친구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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