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 전 내가 제주에서 보낸 편지가 남긴 여운이 가시질 않아서일까. 나는 다시 제주에 다녀왔어. 내가 경험한 수많은 제주 중에 날씨가 유난히 환상적이라 기분이 들떴던 나날들이었지. 눈을 다 뜰 수 없을 만큼 눈부신 햇살과 바다 위에 부서지듯 수놓아진 윤슬. 구멍이 송송 난 까만 현무암과 대비되게 낮게 동동 띄워진 하얀 구름들. 무엇을 보아도 그림이 되는 풍경 안에서 한참을 걸었어. 바람이 스칠 때마다 도시에서의 각지고 굳었던 마음의 모서리가 둥글어지는 것을 느끼면서.
왜 제주에 오면 이렇게 마음이 편안해지는 걸까, 생각해. 누구나 힘들 때 안심하고 떠날 수 있는 피난처를 가진 건 아닐 텐데, 그걸 가지고 있는 나는 참 운이 좋은 사람이더라. 어쩌면 이곳이 편한 이유는 혼자 온 사람들의 흔적이 곳곳에 스며 있어서일지도 몰라. 어느 책방이든 카페든, 방명록에는 늘 사람들의 고민들이 빼곡히 적혀있으니까. 누군가 남긴 고민과 사연을 읽다 보면 우리 모두 어딘가 부서진 채 살아가고 있구나, 싶어서 괜히 눈시울이 붉어져. 어딘가 고장 난 마음을 위로받기 위해 모여드는 것만 같은 해방의 섬. 나와 누군가의 슬프고 지친 마음을 조금씩 두고 갈 수 있는 치유의 공간.
내년 10월의 나에게 편지를 또 썼어. 이맘때면 하지 않으리라 다짐했던 고민들을 여전히 하고 있는 미련함, 끝내 붙잡고 있는 불안과 욕심, 뒤처질까 조급해지는 버릇에 대해 조심스레 털어놓았지. 그리고 조금은 가벼워졌어. 책을 읽거나 글을 쓰지 않을 시간들은 정말로 여행을 즐겼어. 모든 걱정과 염려를 내려두고 ‘지금’을 온전히 살아보자고 결심했거든. 먹고 싶던 걸 다 먹고 마시고, 새로운 사람들과 웃고 떠드는 그 모든 순간이 찬란했어. 이렇게 늘 스스로의 행복과 쉼에 큰 가치를 부여하며 순간순간을 만끽하는 삶을 살고 싶다는 결심을 다시 하게 되며 나다움을 다시 찾았어. 인생은 영원하지 않고 세상 모든 사랑스러운 것들은 언젠간 사라지기 마련이지만, 순간순간은 영원하다는 걸 다시 한번 믿게 해 준 시간이었어.
책방에서 읽은 김영하 작가의 <단 한 번의 삶> 속 문장이 자꾸 마음에 남아. 누구나 만약 그 길로 갔더라면 혹은 가지 않았더라면이라는 상상을 하며 자주 후회에 도달하지만, 내 눈앞의 세계는 내가 하마터면 살 수 있는 n개의 인생 중 하나라고. 지금 이 생은 태어나면서부터 주어진 것과 스스로 결정한 것들이 뒤섞여 만들어진 유일무이한 것이며 나에게는 이 삶을 잘 완성할 책임이 있다고. 그 문장을 읽으며 생각했어. 지금의 나는 수많은 가능성 중 하나의 삶을 선택해 살아가고 있구나. 지난 선택들은 모두 나를 이루는 재료들이었고, 그것들이 섞여 지금의 내가 만들어졌구나. 그러니 후회할 필요도, 미리 걱정할 이유도 없겠구나.
그렇게 쓰인 이번 편지도 2026년의 네게 닿겠지. 그 동안 나는 이 삶을 더 정성껏 빚어내야지. 지금 눈앞의 행복과 선택에 집중하며, 또 다른 1년을 살아가야지. 그리고 언젠가 10년쯤 지나면, 또 다른 내가 지금 이 글을 읽으며 미소 짓고 있겠지. 그때의 나는 지금보다 조금 더 단단하고, 더 현명하고, 무엇보다 자신에게 다정한 사람이 되어 있을 테니까. 후회보다 선택을, 불안보다 현재를, 불안보다 용기를 택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 있을 거라 믿으니까.
나는 여전히 순간을 사랑할게. 가끔은 도망치듯 떠나 이런 쉼표 같은 여행을 선물하면서 고독을 두려워하지 않고 마주하며 살아볼게. 잘 자, 내 사람아. 내일은 날이 추울 거야. 단단히 여미고 나서길.
부쩍 차가워진 10월의 끝자락,
네 친구로부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