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어리 살어리랏다 : 최정화 - 경남도립미술관
※본 전시에 대한 감상과 해석은 지극히 저의 개인적인 생각에 불과합니다.
미술관 입구에 두 개의 야외 전시가 있다. 첫 번째 전시물은 거대한 과일들의 모형이다. 이후에 보게 될 최정화 작가의 작품들과 그 결이 다르다. 이 과일들은 우리가 무언가를 다른 시각으로 바라봐주길 기다리고 있다. 최정화 작가는 우리를 세상의 어떤 위치에 두고 싶은 것일까? 잠시 뒤에 우리는 그 해답을 발견할 수 있다.
두 번째 야외 전시에는 수많은 식기와 조리기구가 모여있다. 인간이 사용한 물건들을 모아서 작품으로 만들어 내는 것, 최정화 작가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다. <살어리 살어리랏다>에서 우리는 수많은 물건들을 낯설게 만나게 될 것이다.
(1) 당신의 빛.
전시는 세 개의 전시실에서 세 개의 테마로 구성되어 있다. 그 첫 번째는 당신의 빛이다. 미처 사진으로 담아내지는 못했는데, 첫 전시실에 들어가면 바로 뒷 벽 모니터에서 개미가 하염없이 걸어가는 영상이 나온다. 영상의 제목은 <인류세를 빙글빙글 도는 개미>다. 이제 미술관 야외에 놓여있던 과일의 의미가 명확해진다. 전시실에 들어선 순간 우리는 개미다. 인류의 시대 옆을 배회하면서 인류의 죽음을 목도하는 개미다. 코로나 시대의 미술관에서, 인간의 죽음과 종말을 떠올리는 건 당연한 수순이다. 그래서 미술관 밖에 많은 식기들이 놓여있었나 보다.
1 전시실의 작품들은 버려진 물건들을 모아 창작해낸 거대한 조형물들이다. 최정화 작가는 인류의 시대가 남긴 흔적들을 주워 모아, 미술관으로 옮겨왔다. 조형들은 대부분 나선 모양이나 탑 모양과 같은 안정적인 모양들로 배치되어 있었다. 본래의 용도를 벗어나 거대한 예술품의 일부분이 된 물건들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 즐겁다. 한 편으로는 인간이 세상에 남겼던 불쾌한 족적들을 다시 가져와 눈앞에 보여준다는 점에서, 어딘가 지구에게 미안한 기분이 들기도 한다.
벽면에 장식된, <당신은 기념비입니다>라는 작품이다. 전시에 참여한 사람들의 이름이 빼곡하게 채워져 있다. 이 벽면의 모습에서 문득 마야 린의 베트남 참전용사 기념비가 떠올랐다. 마야 린은 참전용사들의 추모를 위해 거대한 첨탑이나 위용 넘치는 조각상 대신, 거대한 벽면에 희생된 모든 용사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새겨 넣었다. 이름을 빼곡히 새겨놓은 벽면은 아직까지도 이들을 기억하고 조명하는 공간으로 남아있다.
걸어가는 개미의 모습에서 우리를 "죽음을 목도하는 개미"라고 말하고 싶었던 건 이런 이유에서이다. 예술은 시간과 유한성에 대한 인간의 저항이다. 마치 고대인들이 미라를 만들어서 자신의 육체를 죽음 이후의 세상까지 보존하고 싶었던 것처럼, 인간은 예술을 통해 죽음에 저항하는 방식을 택해왔다. 거창하게 죽음이라는 이름을 굳이 꺼내지 않더라도, 이 많은 이름들은 모두 죽음과 코로나에 대한 저항의 행동양식 이리라.
최정화 작가는 예술은 얼마나 가깝고, 쉬우며, 또 필요한가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 같다. 본 전시의 작품들에서 우리는 전시가 진행되고 있는 경남이라는 공간과 코로나 시대라는 시간을 종종 발견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피부로 와 닿는다. 우리는 예술이 필요한 시공간 속에서, 언제고 예술을 시작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
(2) 우리의 기억
두 번째 전시실의 주제는 우리의 기억이다. 여기서 우리는 인류세의 더 많은 기록들을 만난다. 처음 이 공간에 들어서면 마치 박물관에 와 있는 듯한 기분이 들 것이다. 차이가 있다면, 여기에는 유물에 대한 어떤 설명도 없다. 만약 미술관이 아닌 어느 곳에 이 물건들이 걸린다면, 그것은 분명 유물이다. 하지만 작가가 신중하게 선택하고 비범하게 늘어놓은 순간, 이것은 예술이 된다. 차이가 있다면 이전에 이 유물들은 자연스레 남겨진 과거의 기록이었다면 이제 이 물건들은 의도적으로 미래까지 남겨지기를 바라면서 버티고 있는, 예술이 되었다는 점이다.
미처 사진으로 담아내지는 못했지만, 전시실의 한 벽면에는 많은 사람들의 어린 시절 모습을 담은 사진들로 빼곡히 채워져 있었다. 사진의 본질은 처음부터, 과거의 실재를 기록하고 재현함에 있었다. 전시의 여러 모습들을 사진으로 남겨오려 했으면서도 가장 기록으로 남겨지고 싶어 하는 "사진들"은 미처 담아오지 못했다니.
2 전시실에는 관객이 직접 참여하는 형태의 작품이 있었다. 이 세 개의 조각상 앞에는 여러 이젤들이 놓여 있었다. 이젤에는 종이와 사인펜, 색연필이 쌓여있었다. 관객을 조각상을 보고 그림을 그리면, 그 그림들을 벽면에 걸어주는 형태의 전시였다. 친절하게도, 코로나 이후 인류의 시대를 기억하는 이 공간에 작가는 관객들에게도 각자 자신만의 미라를 남길 기회를 주었다.
하지만 그 미라는 사실 나만의 미라는 아니었다. 내가 그리는 것은 원본이 아니었다.
비너스 여신이라는 원본을 복제한 밀러의 비너스 상, 밀러의 비너스를 다시 한번 복제한 최정화 작가의 비너스 상, 그리고 그 최정화 작가의 비너스 상을 다시 한번 복제한 결과물이 나의 비너스 상이 었다. 아주 오랜 시간 전부터 인간이 반복해온 재창조의 흐름 속에 작가는 친절히 우리가 비집고 들어갈 틈을 마련해줬다.
나는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죽음을 극복하기 위한 저항의 거대한 흐름 안에 내 발을 끼워 넣어야 했다. 하지만 원본이 없는 예술들을 이어가야 한다는 것은 조금은 씁쓸했다. 여기에 대한 소극적인 저항으로, 나는 나만 알만큼 사소한 방식으로 나의 원본을 복제들 사이에 끼워넣기로 했다. 그래서 비너스의 이미지를 최대한 해체한 다음, 내 손가락에 사인펜을 문질러 내 지문을 새겨 넣었다.
(3) 무이무이
3번째 전시의 메시지는 명확하게 한 단어로 제시되었다. 다르지 않고 둘이 아니다. 무엇이 그렇다는 말일까? 전시실에 들어가면 우리는 두 가지의 반복되는 이미지를 발견할 수 있다. 첫 번째는 많은 거울들이다. 두 번째로는 이 일련의 숫자들이다.
최정화 작가는 수많은 피보나치수열의 이미지들을 새겨 넣었다. 이 네온사인들, 요즘은 길거리 술집에서 많이 보이는 인테리어와 언뜻 닮아있다. 차이가 있다면 여기엔 어쭙잖은 SNS 감성의 문장들 대신에 자연의 완전한 언어가 새겨져 있다는 점이다. 피보나치 수열이 새겨진 작품들의 제목은 당신의 밝은 미래다. 자연의 아름다움과 나의 밝은 미래는 다른 것이 아니고 둘이 아니다. 거울에 비친 세상과 나 역시 다른 것이 아니고 둘이 아니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최정화 작가의 모든 작품들이 자연의 완전한 언어를 숨겨놓고 있었다. 나선형 구조, 위보다 아래가 굵직한 안정적인 탑 모양, 원형 구조 등등, 모든 작품들이 알맞은 비례와 안정감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버려진 재료들을 한데 모여 거대한 안정감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인간의 흔적들과 아름다운 예술품은 다르지 않았고, 둘이 아니었다.
다시 생각해보면 시종일관 밝은 분위기를 전하려던 전시회였다. 거기에서 굳이 죽음의 이미지와 세상의 불안을 읽어내려 한건 어쩌면 나의 오독이었을지도 모른다. 전시회 속에서 배회하다 보면, 코로나라는 건 정말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지기까지 한다. 이게 바로 예술이 세상을 위로하는 방식인가 보다. "힐링"이라는 표현을 정말 싫어하는 나지만, 이번 전시의 경험을 표현하는 데에는 "힐링"이라는 표현만큼 적절한 표현이 없을 것 같다. 나는 치유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