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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정화 Jul 14. 2020

밤과 안개

<밤과 안개>, <사울의 아들>, <귀향>

  장 뤽 고다르는 그의 작품 <영화사>에서 이렇게 말했다. 


"영화는 현실을 기록하는 힘을 가지고 있지만, 1940년대 활동한 감독 어느 누구도 아우슈비츠에 있었던 비극을 담지 않았다. 그들은 현실을 외면했고, 그 현실 또한 영화를 버린다. 그리고 알랭 레네의 <밤과 안개>를 통해서야 사람들은 아우슈비츠에서 있었던 끔찍한 일들을 눈으로 확인하게 된다."


<키오스 섬의 학살> - 외젠 들라크루아

  19세기 후반까지 실재를 재현하고 기록하는 일은 회화의 역할이었다. 회화는 실재를 최대한 똑같이 재현하는 기계적 비례의 실현에 목표를 두었고, 따라서 역사 속의 중요한 비극들은 화가들의 붓을 통해 기록으로 남았다. 그러나 이 신성한 의무는 카메라의 탄생과 동시에 영화에게 넘겨지게 되었다. 영화는 카메라의 눈을 통해 시공간을 실제와 똑같은 모습으로 기록할 수 있었고, 비극은 더 이상 캔버스가 아닌 스크린 위에 기록으로 남았다.

  아우슈비츠의 참상이 끝났을 때, 처음으로 사건을 세상에 알리는 건 생존자들의 몫이었다. 아우슈비츠에서 돌아온 생존자들이 처음으로 그곳을 증언했을 때, 그들은 자신들이 경험한 것이 사실이라는 것을 증명하고자 노력해야 했다. 사람들은 인간이 어떻게 그런 일을 할 수 있는지에 경악했고, 그 일을 부정하고 싶어 했다. 생존과 증명은 유쾌한 일로 오인되기 쉽지만, 아우슈비츠에 대한 증언자들의 삶은 쉽지 않았다. 세계가 바뀔 것이라고 기대했던 생존자들은 끊임없이 반복되는 세상 속의 수많은 정치적 폭력들을 목도해야만 했다.

  예술은 현실세계가 낯설게 재현된 공간이다. 예술은 현실을 반영하고, 현실은 다시 예술을 반영한다. 아우슈비츠의 존재는 그 자체로 예술에게 요구된 의무였다. 그러나 증언자들이 계속해서 무거운 짐을 지고 있는 동안에도, 이 세상의 카메라는 20년에 가까이의 시간 동안 침묵했다. <밤과 안개>는 그 침묵을 깨는 작품이다.

  위에서 제시한 <영화사>에서 고다르가 한 말은 홀로코스트를 다루는 데에 소극적이었던 이들을 비판하는 데에 더욱 힘이 실려 있지만, 동시에  <밤과 안개>가 어떤 가치를 지니고 있는지 시사한다. 본작은 아우슈비츠 사건 이후 약 20년이 지난 시점에서 알랭 레네가 촬영한 아우슈비츠 유적의 모습과 2차 대전 당시 촬영된 아우슈비츠의 모습을 병치하면서, 내레이션을 통해 진행된다. 이 단순하고도 명료한 에세이를 목격하기까지 우리는 20년의 세월을 기다려야 했다.

  누구나 카메라가 달린 스마트폰을 소지하고 있는 이 시대에 영화에게 '신성한 의무'를 요구한다는 것은 다소 받아들여지기 힘든 주장이 되었다. 세대와 세대가 지나면서, 아우슈비츠를 비롯한 과거에 일어난 정치적 폭력들에 대해 예술이 가질 의무는 사라졌지만 대신에 20세기 후반 즈음부터 우리는 아우슈비츠를 배경으로 하는 많은 '극영화'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극영화들은 다큐멘터리와는 또 다른 방식으로 우리에게 아우슈비츠를 각인시켰다. 관찰자의 입장이 아닌, 체험의 영역으로 우리를 안내했다. 그러나 아우슈비츠를 배경으로 하는 극영화들은 언제나 역사적 사건 속 폭력의 전시에 대한 당위성을 두고 윤리적인 비판을 받아왔다. 라즐로 네메스의 <사울의 아들>은 지난 수십 년간 등장한 많은 아우슈비츠 배경 영화들 중에서는 이러한 비판에서 어느 정도 탈피하는 데에 성공한 가장 모범적인 사례에 해당한다. 

영화 '사울의 아들' 스틸컷. ⓒ그린나래미디어(주)

  오직 등장인물에게 집중할 수 있게, 그리고 이미지가 폭력을 지나치게 '전시'하는 것을 막기 위해, 영화는 단순하고도 독특한 연출의 방식을 채택했다. 카메라가 2시간 내내 등장인물의 등을 비추면서 따라가는 방식을 취한 것이다. 다소 답답해 보일 수 있는 시야를 통해서, 관객은 등장인물에 완전히 몰두하게 된다. 그의 등 너머로 보이는 공간은 하나의 거대한 악의 모습을 하고 있고, 영화는 두 시간 동안 그 지옥도를 휘젓는다. 이 방식을 통해 본작은 자극적으로 폭력을 전시하지 않고도 관객을 관찰자가 아닌 체험자의 영역으로 올려놓는 데에 성공한다.

  <사울의 아들>은 영화가 정치적 폭력의 상황을 어떻게 묘사해야 하는가에 대한 훌륭한 예시들 중의 하나일 뿐, 어떤 작품의 방식이 맞고 어떤 작품의 방식이 틀렸다고 명확히 말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밤과 안개> 이후 할리우드와 유럽의 영화들은 아우슈비츠라는 장소에 대해 끊임없이 다양한 방식의 극화를 시도해왔다는 점이다.

  반면, 대한민국의 상황은 조금 다르다. 아우슈비츠와 비슷한 시기에 대한민국에서는 비인간적 정치적 폭력인 일본군 위안부 사건이 있었다. 위안부를 아우슈비츠와 '비슷한 강도'의 무언가로 취급한다거나 하는 생각은 위험하고 또 경계되어야 하지만 두 사건의 시기가 비슷하고, 증언자들이 몇 남지 않았으며 집단의 정치적 폭력 상황이 만들어낸 비극이라는 공통점이 있기에 이 글에서는 아우슈비츠 필름과 위안부 영화를 대치시켜 이야기하고자 한다.

  대한민국 극영화는 아직까지 과거의 정치적 폭력에 대한 이야기를 제대로 담아내지 못하고 있다. 이제 막 이에 대한 영화들이 등장하기 시작한 수준인데 그 수준은 처참하다. 특히, 2015년 개봉한 조정래 감독의 <귀향>은 역사적 비극을 다루는 데에 있어서 예술이 결코 해서는 안될 거의 모든 실수들을 일일이 범하고 있다. <귀향> 속 연출의 역량 부족이나 시나리오의 미숙함은 논외로 치더라도, 이 작품은 해서는 안될 실수들을 너무 많이 범하고 있다.

  가장 먼저 주목해야 할 점은, 영화가 집단 강간의 장면을 어떻게 연출했는가이다. 본작은 그 모습을 카메라가 하늘 높은 곳에서 땅을 촬영하는 Bird's Eye View를 택했다. 감독은 절대로 전시되어서는 안 될 끔찍한 비극의 양상을 미적인 감각을 접목하여 보여주려는 실수를 범했다. 다른 컷에서는 피해자의 시선에서 가해자를 로우 앵글로 비춘다. 이번에는 폭력의 공포를 영화가 앞장서서 과장한다. 굳이 역사 속의 추악한 비극을 시각적으로 묘사하고 싶었다 하더라도, 영화는 두 방식 중 어떤 방식으로도 이 장면을 연출해서는 안됐다.

  영화 전반에 드러나는 문제는, 작품 속 소녀들의 인간적인 면모들을 지나치게 생략했다는 점이다. 모든 성폭력 피해자가 반드시 완전히 착하고 선하기만 한 인물로 그려져야 할 필요는 없다. 집단적 폭력의 사건을 다루는 작품이라는 이유로, 인물의 배경, 원래의 삶, 원래의 성격까지 모든 것을 배제한 채 영화가 시작과 동시에 비극으로의 진행을 시작해야 할 필요는 없었다. 작품은 그저 순진하고 착해 보이는 소녀들을 러닝타임 내내 비극 속에 가두어 두는 방식으로 비극을 재현했다.

  언제 인간은 역사 속에서 끊임없이 반복되는 정치적 폭력의 연결고리를 끊어낼 수 있을까. 그 해답에 가까워지기 위해서 예술은 조금 더 역사의 비극에 관심을 가져야 할 필요가 있다. 언제 우리는 대한민국 극영화에서 정치적 폭력에 대한 제대로 된 논의를 마주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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