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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정화 Dec 27. 2024

이순신이 온다

2024년 한국 영화 결산

2024년의 한국영화계는 영화 <파묘> 속 표현을 빌리자면 ‘허리가 끊어진’ 해였다. 천만을 훌쩍 넘긴 <서울의 봄>, <파묘>, <범죄도시 3>, <범죄도시 4> 이 세 편의 영화를 제외하면, ‘적당히 흥행한 영화’를 찾아보기가 어려워졌다. 세 편의 영화는 무엇이 달랐을까.

<서울의 봄>, <파묘>, <범죄도시 4>는 각자 다른 외피를 가졌지만, 모두 분명한 히어로물이었다. 세 영화 속의 주인공들 모두 자신의 자리에서 주어진 바에 대한 직업적 책임을 다하는 방식으로 사회의 정의를 구현해 낸다. 또한 이 영화들은 개인적인 삶과 고뇌는 배제했다는 점, 멜로드라마적인 요소들은 오직 주인공들의 영웅적인 면모를 부각하는 정도로만 활용된다는 점에서 닮았다. 

이들 중 <파묘>와 <서울의 봄>에서 공통적으로 읽어낼 수 있는 키워드는 ‘이순신’이다. <서울의 봄>의 이태신은 이미 패배한 싸움에서 가장 이상적인 군인의 모습으로 그저 자신에게 주어진 바에 묵묵히 최선을 다하는, ‘홀로 서는’ 히어로다. 이 점에서 이태신은 명량 3부작 속의 이순신과 닮았다. 국가가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해도, 이미 패배한 싸움처럼 보여도 그는 그저 행하는 군인이다. 그의 이름이 ‘이’ 태 ‘신’인 것도 우연이 아니다.

이순신의 모습은 <파묘>에서도 발견된다. 중반까지는 미스터리를 동력으로 하는 오컬트 호러영화의 문법으로 진행되던 이 영화는 중반부에서 문득 모든 미스터리들을 공개해 버린 후, 일본 귀신과 싸우는 한국 히어로들의 서사로 변모한다. <서울의 봄> 속의 히어로가 국가가 자신을 버렸음에도 국가에 헌신하는 장군으로써의 모습으로 이순신과 닮아있다면, <파묘> 속의 히어로들은 일본에 대한 우리의 역사적인 울분과 싸운다는 점에서 이순신과 닮아있다. 두 영화 속에서 우리는 실제로 이순신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서울의 봄>에서는 동상으로써 그 모습을 드러냈다면 <파묘>에서는 백 원짜리 동전에 그려진 모습으로 나타났다.

미국에서 히어로물에 대한 유행의 시작은 9.11 테러였다. 일본 영화 역시, 히어로물의 방식으로 드러난 것은 아니었지만 동일본대지진 이후의 일본 영화는 분명히 이전의 영화들과 달랐다. 그렇다면 지금 한국영화 속 이순신의 부활은 어떤 사건에서 온 것일까? 한국인의 집단적 트라우마는 특정한 하나의 사건에서 온 것이 아니다. <범죄도시>, <파묘>, <서울의 봄> 속의 히어로들은 각각 다른 것들과 싸운다. 국가의 안전을 위협하는 이들, 일본 식민 역사의 잔재, 그리고 제대로 맞서보지도 못하고 군부 세력에게 나라를 빼앗겼던 굴욕적인 역사와 싸운다. 수많은 사건들이 관객들에게 ‘정의롭지 못한 세상’에 대한 공통적 인식을 갖게 했다고 말하는 것이 더욱 적절해 보인다. 한국 사회의 정의롭지 못함을 다룬 영화는 세 편의 영화뿐만 아니다. 일본의 침략에 맞서는 영화로는 명량 시리즈가 있었고, <남산의 부장들>이나 <행복의 나라> 등 10.26이나 12.12를 다룬 영화들이 지난 몇 년간 다수 개봉했다.

주목할만한 점은 세상의 많은 정의롭지 못한 모습과 싸우는 히어로들의 모습이 점점 변화하고 있다는 점이다. 80년대 영화들 속 ‘바보’처럼 미래의 희망을 상상하기만 하던 일그러진 히어로들은 더욱 당당하게 당대의 공권력과 맞서기 시작했고 일본에 대한 역사적 울분은 오컬트 장르라는 전혀 새로운 문법과 결합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순신은 천만 영화들에서만 모습을 드러낸 것이 아니었다. <행복의 나라> 속 박태주는 비록 히어로는 아니었지만, 군인이라는 직업의 모습에 최선을 다했으며 정인후는 변호사의 방식으로 무너진 국가 시스템에 끝까지 저항했다. <하이재킹> 속 전태인은 기장으로서의 본분을 다함으로써 시민들을 지켰고 <시민덕희>의 김덕희는 거대한 범죄조직 전체와 맞섰다. <베테랑 2>의 형사들은 마석두 형사만큼이나 강했다. 물론 이순신이 직접 등장한 <노량: 죽음의 바다>도 빼놓을 수 없다.

이렇게 많은 이순신들이 있었지만 왜 관객들은 오직 세 명의 이순신들에게만 열광했을까? ‘결말’에서 그 이유를 찾고자 한다. 올해 천만영화 세 편은 확실한 쾌감을 가져다주는 결말을 장착했다.  악역들은 그들 각자의 사연을 절절하게 늘어놓지 않는 확실하게 나쁜 인물들이었으며 히어로들은 이들을 무찌르며 관객들의 집단적 불안을 완전히 꿰뚫는다. 심지어 <서울의 봄>은 존재하지 않는 바리케이드 대치 장면을 상상해 낸 후, 이태신을 전두광의 바로 앞까지 데려가, 면전에 강한 일갈을 퍼붓기까지 했다. 2024년의 관객들이 원한 건 강력한 ‘사이다’였다.

요약하자면, 2024년에는 사회가 아직도 올바르지 못하다고 생각하는 어떤 관념들에 대해 당당하게 맞서고 결말부에서는 확실한 쾌감을 선사할 수 있는, 히어로물의 문법을 따르는 영화들이 큰 사랑을 받았다. 사회의 정의로움에 대한 의구심이 계속되는 한, 영웅 이순신은 끊임없이 새로운 모습으로 변주되어 우리 앞에 나타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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