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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IN Aug 23. 2019

백두산은 나에게

서른 랩소디


지난주 부모님과 함께 백두산에 다녀왔다.

봄에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를 읽으면서 중국 여행을 꿈꿔보다가, 백두산도 같이 보면 어떨까 싶었다.


마침 독서모임에 오시는 회원님 중에 한 분이 중국 여행을 안내하는 여행사에서 일을 하고 계셨다. 백두산에 다녀오는 패키지 상품도 있었다. 북파, 서파로 두 번 백두산에 오르는 일정의 상품을 선택했다.


첫째 날에 비가 많이 내려 백두산이 봉쇄되었다. ‘삼대가 덕을 쌓아야 볼 수 있다’ 백두산 천지이지만 주변의 지인들은 모두 보았다고 하길래, 나는 당연히 천지를 볼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산에 오르는 것조차 할 수 없으니 ‘산에 올라가 볼 수 있다면’하고 마음을 조금 내려놓게 되었다.


둘째 날에는 다행히 산에 오를 수 있었다. 버스에서 내려 1440개의 계단을 걸어서 올랐다. 돈을 내고 가마를 타고 오르는 사람도 보였다. 하지만 비가 많이 내렸고, 안개에 싸인 천지는 결국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다. 잠깐이나마 ‘천지를 볼 수 있지 않을까’했던 마음을 또 내려놓게 되었다.


셋째 날에 다른 길(북파)로 다시 백두산에 올랐다. 이날은 바람이 무척 셌다. 패딩과 점퍼를 입고도 덜덜 떨었다. 천지 쪽에서는 끊임없이 바람과 함께 안개가 피어올랐다. 아주 작은 돌멩이들이 바람에 날려 다니며 얼굴을 때리고, 심지어 주머니에도 들어가 있었다.


두 시간 정도 하염없이 기다렸을 때, 갑자기 주위가 환해지며 안개가 스르르 걷히더니 천지가 모습을 드러냈다. ‘와아~’하고 소리 지르는 사람들 사이에서 핸드폰을 들고 카메라 어플을 누르는 순간, 천지는 또다시 안갯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3초? 아니 한 5초쯤 보았을까?

그 이후로 한 번 더 살짝 파란 천지가 보였다.

왠지 더 기다리면 조금 더 볼 수 있겠다는 생각도 했지만, 함께 산에 오른 사람들이 내려가기를 원했다. 아쉬운 마음을 두고 내려왔다.


삼일 동안 기다렸던 순간, 아니 지난 몇 개월간 고대했던 천지를 보는 것이 겨우 5초도 되지 않아 끝났다. 물론 안개와 바람 사이로 천지가 파랗게 나타날 때의 신비로움은 여운을 남겼지만, 한편으로 허무함이 드는 마음을 어찌할 수가 없었다.


천지를 보고 내려오는 길, 하늘은 점점 맑아지고, 풍경은 아름다웠다. 산 밑에는 이렇게 맑아도, 천지 쪽에는 안개가 자욱한 날들이 많단다.



‘만약 이번 여행의 목적이 백두산 천지를 보는 것이 아니었다면 어땠을까?’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산, 그곳의 맑은 천지’ 이것 하나만으로도 관광 상품이 될 수 있을 정도로 매력적이지만, 이 여행의 목적이 다른 곳에 있었으면 어땠을까? 예를 들면, 이 끝도 없는 옥수수밭의 옥수수는 다 어디로 가는지 알아보는 것이라도.(여행이 끝나기 전에 가이드에게 물어보니, ‘사람도 먹고, 동물도 먹는다. 그냥 소를 옥수수밭에 풀어놓기도 한다’고 한다)


아마 내가 깨끗하고 맑은 천지를 보지 못한 아쉬움에 괜히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천지를 실컷 보았다면 달랐을까?) 그렇지만 ‘천지를 보겠다’는 일념으로 놓친 것들이 떠올랐다.


우리의 백두산을 ‘장백산’이라 부르는 중국인들은 어떤 마음으로 천지를 보러 올까?(아빠는 '우리야 그렇다 치고, 중국인들은 왜 이렇게 천지를 보겠다고 새치기까지 하는지' 궁금하단다)

우리나라처럼 ‘삼대가 덕을 쌓아야 천지를 본다’는 속설이 있을까?

북한 쪽에서 바라보는 천지는 어떤 모습일까?

오늘 북한 쪽에서도 천지에 오른 사람들이 있을까? 우리나라 말을 하면서도 중국에서 소수민족으로 살아가는 조선족의 삶은 어떨까?

과거 독립운동가들이 머물렀던 곳은 어디였을까?


좀 더 자세히 보지 못한 것들에 대한 아쉬움이 남았다. 백두산을 오르는 사람들, 천지가 보이기를 기다리는 사람들의 표정이 참 풍부했는데. 백두산 근처의 공기는 참 시원하고 맑았는데. 백두산에 오르는 길 주변 풍경이 참 멋졌는데.


<여행의 이유>에서 김영하 작가는 ‘여행은 항상 기대한 바와 다르며, 그로 인해 인생의 행로가 미묘하게 달라지기도 한다’고 말한다.

이번 여행을 통해 나는 ‘맑고 깨끗한 천지’를 기대했지만, 비와 바람 그리고 안개와 추위를 맛보았다. 백두산보다 너르디 너른 옥수수밭을 지겹도록 오래 보았다.


또한 우리나라의 역사이자, 중국의 현실인 ‘조선족’에 대해 조금 더 알게 되었다. ‘보이스 피싱’과 연관하여 생각해왔던 ‘조선족’이라는 단어가 우리의 아픈 역사의 일부로 다가왔다.


척박한 땅을 일궈내고도 차별받으며 살아가는 이 사람들을 조금 더 알아보고 싶어 졌다. 그들 중에는 북한에도 그리고 남한에도 가족이 있는 사람도 있다. 그래서 일 년 중에 대부분은 중국에 머물지만 명절 기간에는 북한에 다녀오고, 휴가기간에는 남한에 다녀오기도 한다. 오히려 이들만이 분단된 한반도를 유일하게 누빌 수 있다.


백두산은 나에게 천지로 기억되기보다는 백두산 아래에서 살아가는 우리 민족, 공기, 그리고 옥수수밭으로 남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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