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창 기독교 세계관을 알아가려고 할 때
이런 고민을 했다.
산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지.
아니면 어떤 의미 같은 것이 없는 것인지.
산다는 게 정말 좋은 것인지.
왜 인생에는 고통이 그렇게 많은 것인지.
아직 확신할 수는 없지만
내가 내린 ‘살아있는 것’의 의미는
‘정신과 영혼 그리고 육체가 만나는 순간’이다.
하나님이든 혹은 다른 어떤 신이든 만약 신이란 존재가 있다면, 인간을 천국에(고통이 없는 곳에) 둘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인간이 ‘삶’ 안에 갇혀있는 이유는
이 순간을 통해서만 경험할 수 있는 것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혹여나 신이 없다 하더라도 우리는 죽을 것이고, 그럼 우리의 몸은 점점 먼지가 되어 흩어진다. 살아있을 때 우리의 정신과 영혼이 추구하는 바를 실현할 수 있는 것은 몸이라는 형체가 있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나’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그저 어떤 외모를 가진 어떤 사람이 아니라,
어느 정도의 세포들과 어딘가로 향한 집념과 또 무엇인지 모를 기운의 합이다.
이것이 나로서 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다.
이것들은 끊임없이 상호작용하며 나라는 인간을 유지한다.
그래서 산다는 것은 내 집념을 기운에 허락받고, 세포들로 하여금 눈에 보이게 만들어내는 것이다. 가끔은 눈에 보이는 세포들(물질적인 것들)이 나의 집념과 에너지에 영향을 주기도 한다.
누구나 이렇지 않을까?
종종 겉은 멀쩡해 보였는데 삶을 스스로 포기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을 때면, 단순히 눈에 보이는 것(육체, 물질적인 것, 세포)들이 잘 산다고
정말 잘 살아있다는 것이 아님을 느낀다.
오랫동안 그들의 영혼이 상처 받고 정신이 끝을 향해 달려왔을지도 모를 일이니까.
한편, 같은 인간으로서 느끼는 고통이 비슷할진대 자신의 고통을 마다하고, 뜻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던질 수 있는 사람들도 있다.
나라를 구하기 위해, 타인을 살리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사람들 말이다.
그런 분들은 자신의 뜻과 집념을
육체적 고통보다 위에 두고, 모든 에너지를 소진한 삶을 살았다는 생각이 든다.
이렇게 살아있다는 의미를 생각해보았을 때, 산다는 것은 ‘좋고 나쁨’으로만 규정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 ‘고통과 행복’으로도 양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스스로 자신의 삶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겠느냐 아니냐’로 나뉠 수도 있을 것이다.
사는 동안 내가 가진 시간과 에너지를 어떤 곳을 향해 쏟아갈 것인지.
그것으로 나는 어떤 영혼을 만들어갈 것인지.
지금 어떤 영혼을 만들어갈지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이
살아 있다는 것의 의미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