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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IN Feb 11. 2020

소떼쫓기

캄보디아 캄퐁톰에서

어디선가 새소리가 들린다.

한 마리가 아름답게 곡조를 뽑아내는 것이 아니다. 새벽부터 동네 반상회라도 하는 것 마냥 수십 마리의 새가 모여 저마다 수다를 떠는소리가 들려온다.

의식이 돌아오며 나는 눈을 뜬다. 그럼 아침이다. 핸드폰 알람이 필요 없다.

새소리와 함께 아이들이 움직이고 떠드는 소리가 들려온다. 아이들은 새처럼 조잘대며 아침을 맞이한다. 무슨 말인지 나는 알아들을 수 없어,

그 소리가 정말 새소리처럼 들린다.

한 명은 옷을 갈아입고, 한 명은 머리를 빗고,

또 한 명은 빵에 연유를 발라먹고..

그렇게 각자 분주하다.


아이들의 조그만 등에 커다란 가방이 걸리면 부엌 쪽의 들판에서 해가 떠오른다.

해는 부엌 쪽에서 떠오르고, 내방이 있는 들판 쪽에 떨어진다.

 해가 떠오르는 것은 장엄하다.

그 커다란 해가 쑤욱 쑤욱 올라오는 모습을 보고 있자면, 귓가에는 오케스트라가 연주되고 있는 것 같다.


오늘 이 커다란 해가 다시 내 방의 들판으로 떨어질 때까지 어떤 하루를 보내게 될지 기대하게 된다. 아이들에게는 어떤 하루 일까?

밥을 잘 먹어 통통하게 살이 오른 강아지들에게는 어떤 하루 일까?

한쪽 눈으로 살살 살펴가며 남의 집에 풀을 뜯어먹으러 들어오는 소들에게는 어떤 하루가 될까? 조금 있으면 옆집 수탉과 암탉이 뒷마당으로 데이트를 하러 나올 것이다.

옆집 겁쟁이 개들도 입 짧은 우리 집 강아지들이 남긴 밥을 훔쳐 먹으러 올 것이다.

나에게는 어떤 하루가 될까?

커피를 마시며 책을 읽고, 늘어지게 낮잠이나 자게 될까? 아니면 시장에 따라 나서 망고를 사 먹게 될까?


나는 기대 없이 왔다.

이곳에 오면서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고 스스로와 약속했다.

무언가 해야 한다는 압박감으로부터

단 2주 만이라도 벗어나 보고 싶었다.


그래서 책도 읽다가 '끝까지 읽어야 할 것 같은' 부담감이 생기면 바로 내려놓는다.

글도 쓰다가 '많이 써야 한다'는 혹은 '잘 써야 한다'는 불안감이 생기면 노트를 덮는다.

수시로 책을 내려놓고 수시로 멍해진다.


심심한 나는 가끔 신나게 소떼를 쫓는다.

무언가에 조금이라도 집중하고 있다가 돌아보면 꼭 소떼가 집 뒤쪽 마당에 진을 치고 있기 때문이다. 아무도 나에게 틈틈이 소떼를 쫓으라고 당부하지 않았다. 그저 내가 좋아서 시작했다.

처음에는 막대기를 하나 들고나가 소들을 위협했다. 그러나 그들은 눈 하나 꿈쩍하지 않는다. 그래서 자전거를 타고 쫓다가도 가만히 서서 나를 바라보는 소를 보며 두려움이 생겼다.

나중에야 소를 쫓을 때 소리를 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가만히 서서 무기 없이?! 쫓더라도 소는 ‘쉬이 쉬이’하는 소리를 내면 움직이기 시작한다. 하루에도 서너 번 소를 쫓는다.


그러다가 이런 생각도 든다.

‘왜 소를 쫓아야 할까? 잡풀도 뜯어먹고 똥도 싸주면 땅이 기름지게 될 수도 있는데.’

알고 보니 소가 풀만 뜯어먹지 않고, 막 자라고 있는 어린 망고 나무의 잎도 뜯어먹는 것이었다. ‘아하 그래서 모두들 소를 쫓아냈었구나!’

 이제 나는 이유를 알고 소를 쫓기 시작한다.


 이유를 모르고 좇을 때는 소가 마치 '시도 때도 없이 영토를 침범하는 적'으로 생각이 되었다.

나를 보고 도망가지 않는 소들이 미워지며 적의가 차오르기도 했다. 내가 그 땅의 주인도 아니고, 소를 좇는 것이 내 의무도 아닌데 말이다.


소를 좇는 이유를 아니 이제는 마음의 여유가 생긴다. 나의 여유로운 마음이 소를 좇는 소리에서 드러난다. ‘워이 워이’, ‘쉬이 쉬이’.

망고 나무 잎만 못 뜯게 하면 되니까.


사회에서 만난 사람들과의 관계도 이렇게 정해질 때가 있다. 이유도 모른 채 그 사람과 나의 역할이 정해지고, 서로 그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다 싶을 때는 적의가 차오른다.

이유도 모르고 사람들을 미워하게 된다.

그 증오심이 나를 갉아먹는다.

일을 탁 놔버리면, 그 자리를 박차고 나와보면 ‘전에 내가 왜 그랬지?’하는 생각이 든다.

지금 돌아보니 그건 내가 정한 ‘우리’의 관계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과연 내가 이 소들보다 나은 게 무엇일까?

적어도 소들은 자기가 먹고 싶어서 제 발로 걸어 들어왔으니 말이다.

나는 무엇을 원했고, 무엇을 원하지 않았을까? 지금 나는 무엇을 원하고, 무엇을 원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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