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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J Jun 23. 2024

어디서나 여행처럼

story 15. 언제나 생일처럼

잃어버린 고향을 찾기 위해
타향을 헤매는 우리들 - F.Kafka

2019.10.27  (07:40) Brugos - Hornillos del Camino (14:30) (20km)


아침에 일어나니 새벽 6시다. 6시에 눈이 떠지다니 의아한 데다 개운하기까지 하니 이 무슨 신통한 일인가 싶었다. 일찍 일어나 여유롭기도 하겠다 별생각 없이 천천히 채비를 꾸리는데 손목시계를 보니 그 사이 7시 40분이다. 시간이 그렇게 빨리 흘러갈 법도 없으니 낌새를 챘을 법도 한데, 알베르게가 8시면 사람들을 쫓아낸다는 황당한 소문이 왕왕 돌았던 터라 급히 숙소를 나섰다. (어제 애린 씨와 히카르도는 신발도 못 신고 쫓겨나 문 앞에서 영락없이 5시간 동안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던 것으로 미루어보아 소문만도 아닌 듯했다.) 누가 쫓아낸 것도 아닌데 혼자 바쁘게 뛰쳐나와서는 주위를 살피니 사람들은 태평하다. 무슨 일인가 싶어 핸드폰으로 시계를 다시 보니 7시를 조금 넘긴 시간이 아닌가. 제멋대로 널뛰기를 하는 시간을 두고 가만 생각해 보니 불현듯 머릿속에 떠오른 'Summer time'. 아니나 다를까 서머타임이 끝났다는 소식들이 군데군데서 들려온다. 하룻밤 사이에 한 시간을 미루고 당기는 서머타임 따위를 이해할 길 없는 이국의 순례자는 애 멀게 잃어버린 한 시간을 뚱하니 앞에 두고는 억울한 마음을 달래야만 했다.

그들의 눈엔 너무도 난데없을 얼음컵

일찍 나선 김에 천천히 아침을 먹고 나서기로 하고는 카페에 갔다. 유럽에서 아메리카노란 한국에서 한강물 라면을 의미한다는 이야기를 익히 들어 알고 있음에도 아침마다 시원하게 들이켜면 단번에 갈증이 해소되는 '아아(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포기하기란 쉽지 않다. 해서 나만의 노하우로 에스프레소 한 잔과 얼음을 주문하곤 했는데 그럴 때마다 그들의 기준에 너무도 연관성 없는 나의 주문은 그들의 고개를 갸우뚱거리게 만들었다. 오늘도 'Uno espreesso con hielo, por favor (에스프레소 한 잔과 얼음 주세요)'하고 말했더니 직원이 'hielo? (얼음?)' 하고 재차 되묻는다. 도무지 그 두 가지 조합으로 뭘 하려는 속셈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얼음과 커피를 내오고는 내 앞을 떠나지 않고 지켜보는 탓에 얼떨결에 보란 듯 얼음에 커피를 붓는 퍼포먼스를 선보인 꼴이 되었다. 그는 얼마간 이해가 간다는 표정이 되었으나 납득할 수는 없었는지 이내를 어깨를 으쓱하고 자리를 옮겼다.

부르고스 대성당
일출에 흩어지는 구름들

알베르게가 부르고스 대성당 바로 옆편에 있었으므로 나서는 길에 괜히 빙 둘러 지나갔다. 하늘로 뻗은 첨탑의 우아한 자태에 한참 동안 눈을 뗄 수 없었다. summer time이 끝난 것을 아는지 새들도 아침부터 극성이었다. 찌르륵 지지배배 지저귀는 소리는 자연의 것. 자연에서 온 것들은 마음을 편하게 해 주는 재주가 있다. 붉은 동이 조금씩 달아올랐다.

밝아오는 날에 빛나던 길

25년 전 오늘은 내가 태어난 날. 10월 27일, 그러니까 오늘은 내 생일이다. 순례길이라는 성대한 생일상을 차려놓고는 한참을 걷기만 했다. 매 생일을 축하하던 버릇에 홀로 있는 것이 익숙하지 않아 실없게도 공허한 마음이 들었다. 혼자 걷는 것을 좋아하면서 누군가 내 생일을 축하해 주길 바라는 마음이 얼마나 우스운가. 필요할 때에 주변을 둘러보게 되는 모순되고도 간사한 마음. 이런 모습 또한 나이겠거니, 하며 적적한 마음을 달래려 지나가며 만나는 모든 것들에 이름을 지어주고는 오늘 나랑 같이 생일 하자, 고 했다. 그래서인지 걷는 길이 다른 날보다 더 예뻐 보였다.

2019년의 생일상

오늘도 늘상 즐기던 메뉴로 감자튀김과 계란후라이로 점심을 채웠다. 소박한 생일상을 찍어 엄마한테 보내니 안 그래도 생일날인데 잘 챙겨 먹어야지, 한다. 엄마의 눈엔 저 기름진 베이컨과 깍둑 썰린 투박한 감자가 보이지 않는가. 통실하게 달아오른 계란후라이까지 그야말로 완벽한 탄단지의 조화일진대 어디가 부족해 보였던 것일는지. 나의 밥상을 변호하고 나서니 이내 답장이 왔다. '고슬한 밥 한 끼 차려주고 싶어 그러지. 고기 넣은 미역국이랑' 생일이 뭐 대수인가, 엄마가 고생한 날인데.라고 아닌 척을 해보지만 이내 촉촉해지는 눈알이 갓 구운 후라이처럼 반질해졌다. 아, 엄마가 보고 싶네.

산티아고까지 476km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하늘빛이 바뀌었다. 파란 하늘 밑에서는 노랗게 그려놓은 화살표의 색이 더욱 밝아보였다. 그 탓인지 혹은 엄마와의 문자 때문이었는지 불현듯 어릴 적 동네에 봄보다 먼저 피었던 생강꽃이 떠올랐다. 콩밭 옆 소보록하게 피어나던 생강꽃들. 어렸을 적에는 줄기를 손톱으로 긁어 코를 갖다 대고는 톡 쏘는 냄새를 맡곤 했다. 물밀듯 떠오르는 고향의 기억이 생강꽃을 닮은 공처럼 몽글몽글 피어났다. 꽃을 좋아하게 되면 어른이 된 거라고 했던가. 한 해 건너 피고 지는 꽃의 잔상이 생강나무줄기에서 나던 알싸한 냄새를 기억 저편에서 불러왔다. 고향이란 어떤 것일까. 무심코 떠오르는 꽃의 빛깔만으로도 뛰놀던 콩밭과 그 저녁 어스름한 공기 내음이 풍겨오는 것은 무엇인가. 아스라한 기억들 사이 간절하고 쓸쓸한 마음이 드는 까닭은 또 무엇인가.

지나는 길에 들렀던 작은 성당

길을 지나다 아담한 성당이 보여 잠깐 들렀다. 아무도 없는 성당은 오며 가는 순례자들의 작은 기도원이 되어주는 모양이었다. 성당에 들어서면 성당의 법으로 기도를 드리는 것이 마땅할 테지만 본래 기독교로 나고 자랐기에 성호경을 긋는 방법도 몰라 가만히 앉아 합장한 손으로 나의 신에게 짧은 기도를 드렸다. 하기사 종교개혁 이전엔 다 한뿌리 아니었는가. 방법이 다르다고 해서 기도가 하늘로 가다 뚝 떨어질 일은 없지 않겠는가.

끝 간 데 없이 드넓은 벌판과 광활한 하늘
도착 후 목을 축인 맥주와 저녁으로 준비된 빠에야

도착한 Hornillos에는 정말 아무것도 없었다. 일요일이라 작은 구멍가게조차 문을 닫은 것이다. 숙소에 간이매점이 있어 시원하게 맥주로 목을 축이고 쉬다가 수빈과 소영을 만났다. 몇 터울이 지지 않는 우리는 쉽게 물꼬를 텄고 이야기는 자연스레 흘러갔다. 누군가와 가까워지기 위해선 음식을 나누어 먹으라 했던가. 식구(食口)라는 의미가 한솥밥 먹는 사이를 의미하는 것을 보면 그만큼이나 가까워지는 일이 어디 있겠는가 싶어 아껴두었던 라면 한 봉지를 꺼냈다. 보글보글 끓어오르는 라면을 식탁에 내려놓고 일제히 숟가락을 들었다. 나누어먹은 얼큰한 고향의 맛에 밥때가 아니었는데도 냄비는 채 식기도 전에 바닥을 드러냈다. 동네 산책이나 할 겸 나섰던 짧은 외출에서 돌아와 낮잠을 자는데 소영 씨가 조심히 잠을 깨우곤 저녁을 먹으러 오라 했다. 식사가 준비되어 있어 잠을 미처 깨지도 못하고 맥주가 아직 소화도 되지 않았는데 어쩔 수 없이 차려진 파에야를 먹어야 했다. 체기가 올라 결국 소화제를 먹고 잠에 들어야 했으나 행복한 날이다. 내 인생 언제 또 산티아고로 가는 길에 생일을 맞을 수 있겠는가. 그리고 생일이란 무슨 이유가 있냐는 말이다. 이 길을 걷는 동안 매일을 생일처럼 살아가고 있는 것을.


Question 15. 어떤 술을 제일 좋아해? 아, 생일 축하해!

성호경을 못 긋는다 뿐이지 어릴 적 매주 일요일마다 교회를 빼먹은 적 없는 내가 대답하기엔 질문에 다소 어폐가 있다. 종교의 계명을 따르지 못하는 죄의식을 조금 밀어 두고 답하자면 난 술을 즐기고 좋아하는 편에 속한다. 애주가라고들 하던가. 비단 나뿐 아니라 이 '애주가'들에겐 어떤 술을 좋아하는지에 대한 질문이 낯설고 어려울 것이다. 때마다 술로 채우려는 필요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연말연시 도톰한 눈송이가 펑펑 떨어지는 날에는 단연 잔잔한 음악과 기울이는 와인 한 잔이 필요하고, 비 오는 날 서늘하고도 축축한 공기엔 가장자리가 바삭하게 구워진 빈대떡과 막걸리 한 잔이 필요하며, 목련의 겨울눈이 툭툭 터지기 시작하는 봄날이 오면 아직은 스산한 찬바람을 막아주는 비닐벽 속 포근한 포장마차에서 기울이는 소주 한 잔이 필요하니까. 순례길 위에서 자주 비우는 술잔을 생각해 보면 단연 맥주다. 알베르게에 도착하고 나면 타는 갈증을 해소해 줄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이므로. 잘은 탄산이 목을 타고 넘어갈 때의 싸르르한 그 청량감, 코 끝을 타고 풍기는 밀과 호프의 쌉쌀한 비린내가 좋다. '지금'어떤 술을 제일 좋아하느냐 묻는다면 맥주라 대답하겠다. 'Una Cerveza, grande, muy grande por favor.(맥주 한 잔 주세요. 큰 걸로, 아주 큰 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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