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ory 3_비엔티안에서 루앙프라방까지
낮과 밤 사이 어딘가.
느슨하게 흐르는 시간들.
호스텔의 새벽은 언제나 어딘가 엉성하게 지나간다. 두 시 반 즈음 눈을 감았던가, 어름어름 눈을 떠 보니 새벽 다섯 시다. 실눈으로 몰래 시간을 훔쳐보고는 다시 눈을 감았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시간이 놀라서 도망이라도 칠 것만 같았나. 새벽은 언제나 길고 길었으면 하는 마음에 그랬나. '아직 이르네', 하고 중얼거리고는 다시 눈을 감았다. 어차피 세 시간도 채 못 자고 다음날 정상적인 컨디션을 기대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금세 다시 잠이 들었는지 선선한 에어컨 바람이 머리카락을 간지럽히는 기분 좋은 공기에 눈을 뜬 시간이 일곱 시. 루앙프라방으로 향하는 기차는 열 시 반이라고 했지. 삼십 분 전까지 기차역에 도착하려면 아홉 시 반엔 출발해야 한다. 조식도 먹어야지. 환전도 해야지. 해야 할 일들을 천천히 헤아리며 침대를 빠져나왔다.
웬걸, 아무리 찾아도 화장품이 없다. 집을 나서기 전 화장을 마치고는 챙긴다는 걸 깜빡한 것이다. 이마를 짚으니 우두커니 텅 빈 방 안에 차곡히 놓여 있을 내 화장품 파우치가 눈앞에 어른거린다. 며칠쯤 화장 좀 안 하면 어떤가 싶다가도 명색이 여행인데 사진 속에 담길 내 얼굴이 아쉽다. 누군가에게는 화장이야 굳이 해야 하나 싶은 일일 테지만 이해 못 할 이들을 위해 쉽게 말하자면 수염 안 밀고 다니는 느낌 정도이겠다. 어쨌든 나로선 꽤 어색한 일이라 구글 지도에 화장품 가게를 찍고는 그대로 길을 나섰다.
그전에 환전부터 할까 싶었더니 늘어선 건물 사이 환전소가 보이지 않는다. 한참을 기웃거리고 있으니 노점상 여인이 환전소를 찾아왔냐며 물었다.
"Money exchange? (환전?)"
그렇다 말하니 짧은 단어들의 구사로 모든 상황을 설명한다.
"Closed. renovation. 7 month. (닫았어. 공사. 7개월.)"
그러곤 본인이 환전을 해준단다. 어림도 없을걸. 라오스 사람들의 평균 월급은 20만 원이 채 되지를 않고, 비엔티안이야 우리나라 서울쯤 되니 조금 더 높다손 치더라도 30만 원 수준이다. 그러니 한 달 월급에 육박하는 돈을 이 가녀린 노점상 여인이 수중에 들고 있을 리가. 얼마를 원하냐 묻길래 대충 둘러대고 빠져나가려 했더니 일수꾼처럼 커다란 돈뭉치를 꺼내든다. 역시 사람은 외모로 판단하지 말라고 했던가. 1달러에 22,000낍이라며 계산기를 두드리곤 돈을 세는 폼도 예사롭지가 않다. 꽤 높은 편인 것도 같고, 겪어본 바 라오스 사람들의 순진한 표정을 의심할 용기도 없다. 이틀 치 생활비로 100달러를 환전했다.
그 길로는 딸랏사오 마켓으로 화장품을 사러 갔다. 20년 전, 유년시절의 내가 살던 아파트 단지 상가 냄새가 풍기는 건물을 골목골목 지나, 어떻게 하면 촌스럽게 눈에 띌 수 있는지 연구한 것만 같은 간판이 눈에 띄었다. 대부분 유통기한이 지나있었고 재고 정리를 하다 열이라도 받았는지 정해진 자리도 없이 제 멋대로 던져놓은 화장품들을 보니 실소가 나왔다. 아포칼립스 장르의 영화에서나 봤을 법하다. 세상에 대지진이 찾아오거나 좀비가 세상을 점령해서 지구 종말 비슷한 게 찾아온다면 이런 곳에서 화장품을 찾아야 하리라. (그때에도 화장을 해야 한다면 말이다.) 두세 번 재사용할 수 있는 작은 파운데이션 주머니 두 개와, 비슷한 형태지만 뚜껑에 봉이 연결되어 있는 마스카라를 하나 샀다. 이로써 제법 사람다운 뽀얀 얼굴로 여행할 수 있겠지.
널브러진 화장품 가운데서 제법 쓸만한 놈을 찾으려니 시간이 훌쩍 지났다. 곧장 숙소로 돌아가 짐을 챙기고 체크아웃을 했다. 택시를 불렀는데 어제보다는 그럭저럭 쓸만한 차가 왔나 싶었더니 가는 내내 조수석 문쪽에서 타닥거리는 불꽃놀이 소리가 들린다. 도대체 이런 소리는 나게 할래야 할 수도 없을 것 같은데 경이로울 지경이다. 안전벨트를 하려고 보니 어디가 엇나갔는지 맞물리지가 않는다. 슬쩍 옆을 보니 운전자도 채우질 않았다. 뭐 어쩌겠나. 40km의 시속을 넘을 생각을 안 하는 고물차라는 점을 감안하여 제 자리에 살며시 돌려놓았다. 안전벨트로 고군분투하는 나를 보더니 기사가 약지와 새끼손가락에 길게 기른 손톱을 번쩍거리며 슬며시 웃는다. 멋쩍게 나도 살짝 웃어 보이자 어디서 왔냐고 짧은 영어로 이야기의 물꼬를 트더니, 한국이라고 답하자 연신 '까오리, 까오리 (한국사람을 뜻하는 라오어)' 하며 홀로 신나서는 한국노래를 틀어 보인다. 나는 그의 보답으로 그다지 좋아하지도 않는 한국 발라드를 흥얼거려야만 했다.
적어도 기차시간 30분 전까지는 도착을 해야 하는데 예정한 시간보다 10분이나 늦었다. 나는 애간장이 타서 똥꼬에 힘이 바짝바짝 들어가건만 이런 내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노래를 흥얼거리며 온갖 차를 다 양보하고 나섰다. '그래, 기차를 못 타게 되면 그다음 기차를 타면 될 일이고 그 길로 또 다른 여행이 되겠지', 보채려던 말을 겨우 삼켜내고는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풀을 뜯는 여윈 소와 제 키보다 두 배는 큰 철근을 옮기는 공사장 인부들을 눈으로 훑으며 ‘아, 자고로 여행이란 이렇게 눈을 들어 내가 집중하는 것에 시간을 두어야 행복하구나’ 하고 생각해 보려 했지만 조여 오는 긴장감은 어쩔 도리가 없다. 결론적으로 시간은 적절했다. 뛰거나 헐떡이지 않고도 기차에 몸을 실을 수 있었으니까. 여유롭게 기차역 사진을 찍거나 요깃거리를 사지는 못했지만 말이다.
기차는 정시에 출발해 슬슬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비엔티안을 빠져나가는 동안 미뤄두었던 일들과 책의 필사를 마치고 일기를 적었다. 간간이 창밖으로 스치는 풍경들에 눈을 돌렸다. 넓은 초원과 우거진 숲을 지나, 우뚝 솟은 산봉우리를 옆에 끼고도는 길이 가히 장관이다. 라오스를 찾을 계획이 있는 이들이라면 꼭 루앙프라방으로 향하는 기차를 타보길. 중국과 공동으로 설립했다는 기차는 특유의 동남아 스러운 분위기라기보다는 묘하게 낯선 질서감이 있다. 분위기 있게 턱을 괴고 사색에 잠겨보려니까 앞 좌석 사람이 차광막을 내리는 탓에 머쓱해진 턱이 손바닥을 미끄러져 내려왔다. 허기나 채우려 복도를 지나는 카트에서 샌드위치와 커피를 사 먹었다. 누군가 맛을 물으신다면 허사라는 점을 알려드리고 싶다. 자고로 나는 맛이 없는 음식이 없는 사람이니까.
5년 전 배낭여행을 하던 시절, 루앙프라방에서 비엔티안까지는 아직 기차가 개통되기 전이라 10시간 슬리핑 버스를 탔어야 했다. 대단히 편해진 여행이다. 이제는 2시간도 채 걸리지 않고 한참을 쉬워진 덕에 체력도 시간도 아낄 수 있어 감개무량한 마음이 드는 것이 당연한데 마냥 반갑지만은 않은 건 무슨 모순된 마음인지. 반쯤 누워가는 버스를 타고 구불구불한 산길을 밤새도록 흔들리며 지나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한데 이렇게 단숨에 도착할 수 있는 거리였다니, 마음이 도착하기에 어딘가 서두르는 느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나 보다. 다시 찾는 루앙프라방은 또 얼마나 바뀌어있을지.
그때의 여행과 지금의 여행.
뭐가 됐든 여행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