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ory 5_수많은 이야기들
추억은 여전히 그곳에
낡지도 늙지도 않고
5년 전 걸었던 길들이 눈에 선하다. 배낭여행자였던 그 시절엔 기한 없는 여행에 예산을 아껴야 했고 주로 남녀 혼숙 게스트하우스에서 묵었다. 맥주와 과자를 사 와서 들어와 같은 방 사람들과 영화를 보았던 기억이 난다. 새벽의 시간과 인종의 경계가 없던 추억도 새록새록, 하나도 변한 것 같지 않은 길을 따라 잠깐 그때의 게스트하우스에 들러보았다. 모든 여행자의 청춘이 묻어있는 공간. 다른 이의 것들로 덧대어졌을 나의 손때는 흔적도 남지 않았겠지만 쉽게 발걸음이 떼어지지 않아 괜히 오래 바라보았다.
슈퍼에 들러 맥주와 과자를 조금 사서 숙소에 놓고는 야시장으로 향했다. 5년이나 흐른 시간이지만 변한 건 없으리라. 파인애플 주스를 한 잔 들고, 바닥에 차곡차곡 정리를 시작하는 상인들의 물건을 눈으로 훑으며 따라 걷기 시작했다. 루앙프라방의 야시장을 경험해 본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각양각색의 물건을 파는 가판들 사이 간간히 반복되는 진열대가 있는데, 바로 탄피로 만든 기념품을 파는 곳이다.
베트남도 아니고, 국제 전쟁에 참여하지 않았던 라오스에 왜 전쟁의 흔적이 남아있는가 의아하게 여기는 이도 있겠으나 실상은 이렇다. 베트남 전쟁이 한창이던 1964년부터 1973년까지, 라오스는 공식적으로는 중립국이었으나 북베트남의 병참로였던 '호찌민 루트'가 지나간다는 이유로 맹렬한 공습을 견뎌야 했다. 미국은 이 기간 동안 라오스에 약 58만 번의 폭격을 가했고, 200만 톤에 달하는 폭탄을 쏟아부었다고 한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유럽 전역에 떨어진 폭탄의 총량보다 많은 수치다. 라오스는 세계에서 가장 많은 폭탄이 투하된 나라이자 가장 많은 불발탄이 남아있는 곳이다.
'These bracelets were bombs.'
이 팔찌들은 폭탄이었습니다.
'We make bracelets not war.'
우린 전쟁이 아니라 팔찌를 만듭니다.
'Our bracelets are made from the aluminum dropped on our country during the secret war since 1964 - 1975.'
우리의 팔찌는 1964년부터 1975년까지의 비밀전쟁동안 우리의 땅 위에 떨어진 알루미늄 폭탄으로 만들어졌습니다.
'After war someone taught us what to do with the bombs that destroyed our lives.'
전쟁이 끝난 후, 누군가 우리에게 삶을 파괴한 그 폭탄들을 어떻게 활용할 수 있을지 가르쳐주었습니다.
'From bombs we made souvenir such as chopsticks, spoons, rings, bottle opener, bracelets and other...'
우리는 그 폭탄들로 젓가락, 숟가락, 반지, 병따개, 팔찌 등 다양한 기념품을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Recently, we began to form bombs into beautiful bracelets.'
최근에는 그 폭탄들을 아름다운 팔찌로 재탄생시키기 시작했습니다.
'We bring the new meaning bombs and help ourselves and escape poverty.'
우리는 폭탄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고, 이를 통해 자립하여 빈곤에서 벗어나고자 합니다.
'Now buy back your bombs.'
이제 당신의 폭탄을 되사가세요.
살만한 게 있을까 싶어서 이리저리 살피다가 마침 숙소에 병맥주를 사뒀는데 병따개가 없어 하나 사볼까 싶었다. 물론 손에 집히는 적당히 단단한 물건들로 병뚜껑이야 딸 수 있는 요령을 지녔지만 야시장에 온 이상 지갑이 열리는 것이 당연지사, 게다가 평화를 지지하는 연대의 실천이라니. 가격을 물었더니 6만 낍 (약 4천 원)이란다. 아무리 탄피로 만든 전쟁의 산물로 그럴싸한 스토리텔링까지 갖춘 정성이 갸륵하다지만 옆가게에서 제법 근사한 스카프를 3만 낍에 팔고 있는데 가격이 터무니가 없다.
4만 낍으로 흥정하려던 나의 시도가 먹히지 않자 자리를 뜨려 했는데, 그런 나를 불러 세우곤 “오늘은 너의 럭키데이야” 하며 5만 낍에 준단다. 남는 게 없어 아쉽다는 듯 미간 사이를 마른 귤껍질처럼 오그라트린다. 흥정을 계속하기도 뭐 하고 야시장에 발을 들인 초장부터 우격다짐으로 얼굴을 붉히긴 싫어 5만 낍을 쾌척하니, 살그레 웃으면서 내 5만 낍짜리 지폐를 붓삼아 진열된 물건들에 참기름 바르듯 두드린다. 내가 쳐다보니 "럭키데이, 럭키데이." 한다. 한참을 생각해도 뒤가 찝찝해서 다른 가게에 물어보니 초장부터 4만 낍이다. 깎으면 3만 낍도 흔쾌히 가능하다는 소리다. 나는 깨달았다. 그놈의 "럭키데이"는 내가 아니라 자신을 위한 말이었다는 것을. 어쩌겠는가. 좋은 의미로 쓰이길 바랄 수밖에.
앞으로 매일 밤마다 열릴 야시장에 미련을 가질 필요는 없다. 요기나 할 겸 먹자 광장으로 들어서자 치이는 게 한국사람이다. 종로 광장시장인지 루앙프라방인지 잠시 헷갈렸으나 먹거리를 찾아 사고는 자리를 맡았다. 중국 샐러드로 팔고 있는 무침은 마라 샹궈와 비슷했고, 꽤 짜고 맵긴 했지만 그런대로 맥주 안주로 제격이었다. (맛이 없는 게 없는 나니까 당연하다.)
내 테이블 옆을 지나며 한국인 어르신 둘이서 ‘맥주는 어디에서 사는가’ 하는 문제로 꽤나 심도 있는 토론이 벌어졌는데, 보다 못한 내가 그 토론의 장을 깨고 들어가 뒤쪽을 가리키며 말해주었다. 아저씨들도 한국인을 만난 것이 반가우면서도 얼마간 어색했는지 멋쩍게 웃으며 먹고 있는 것은 무어냐 물었고, 나는 그들의 입맛엔 맞지 않을 거라는 걸 직감으로 알 수 있었지만 노점의 위치만 알려주었을 뿐 가타부타 설명하지는 않았다.
맥주와 음식을 깔끔히 비우고는 숙소에 돌아와 개운하게 씻었다. 인건비가 과히 낮은 빈곤국임에는 마음이 좋지 않은 것이 사실이나, 그렇다고 저렴한 마사지를 받지 않을 이유는 없다. 한 시간에 만원도 채 되지 않으니까. 한 시간 동안 마사지를 받으며 혈자리를 푹푹 찔렸던 나는 마사지가 끝나자마자 그녀를 찾아가서는 이름을 물었다. 그녀의 이름은 ‘텅’이라고 했는데, 나는 자존심도 없이 그 길로 리셉션에 가서 ’텅‘에게 내일도 예약을 해달라고 부탁했다. ’텅‘이 보는 바로 앞에서.
개운해진 몸과 녹초가 된 정신을 뚤레뚤레 옮겨서 숙소로 돌아왔다. '낭만'을 운운하며 테라스에 자리를 깔고 일기를 적은 후 하루를 마무리하려 하였으나 낭만은 나의 피와 함께 모두 빨려 모기밥이 되고 말았다. 침대로 돌아와 잠시 또 책을 펴보려 했더니 새까만 모기가 잊힐 때 즈음이면 내 눈앞에 나타나 훼방을 놓는 탓에 책도 눈도 닫고 잠에 들어야만 했다. 여행지에서의 길고 가득 찬 하루가 지나간다. 수많은 이야기들과 함께.
이 순간도 언젠간 추억이 되겠지
낡지도 늙지도 않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