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ory 7_진주를 담은 사슴의 샘
여행은 누구든 어린아이로 만들지.
서툴고 어설픈 엉망으로 완성되지.
가히 절절 끓는 날씨다. 빨래를 널어놓으면 1분도 채 안 돼서 널어놓은 모양 그대로 버적하게 굳어버릴 것 같은 뜨거운 태양이 정수리를 달군다. 이런 날엔 시원한 물줄기 생각이 간절한 법. 루앙프라방 하면 꽝시폭포, 꽝시폭포 하면 루앙프라방이렸다. 오늘만을 얼마나 고대했던가.
꽝시로 향하기 위해 스쿠터를 빌리려고 리셉션 여인 둘과 몸짓과 발짓, 구글번역기와 온 우주가 나서서 도와야 통할 수 있는 초월의 소통을 시도하고 있었는데, 로비 소파에 앉아있던 서양인 아저씨가 어딜 가냐 묻는다. 꽝시 폭포라 대답했더니 갑자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전전긍긍하더니 자기도 따라나서겠단다. 혼자 가려니 선뜻 용기가 나지 않았는데 때마침 구세주를 만났다는 눈빛을 반짝인다. 그 말이 있기 전 잠깐의 대화로 나는 혼자 왔으며, 5년 전에 들렀던 꽝시폭포를 잊지 못한다는 이야기를 했던 터라 정색하며 싫다고 말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게다가 루앙프라방까지 왔는데 꽝시폭포도 보지 않고 갈 위기에 처한 이를 어찌 가만 두겠는가. 꽝시로 가는 길의 풍경을 홀로 충분히 만끽하고 싶었으나 어쩔 수 없지. 홀로 있는 시간은 충분하다. 그렇게 서양인 아저씨 로저와의 의도치 않은 한-미 꽝시연합이 탄생했다.
늘 그렇지만 동남아에서 대여하는 스쿠터엔 큰 기대를 않는 편이 낫다. 몇 번은 공중제비를 돌아 아스팔트에 비벼진 듯하고 백미러는 제 멋대로 뱅뱅 돌아간다. 예상하기로 기대치를 낮춰 굴러가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지만 꽝시폭포로 향하는 1시간 내내 스쿠터에서 끼룩끼룩, 갈매기 소리가 났다.
우리가 보통 말하는 루앙프라방 시내는 관광객이 머무는 올드시티나 야시장 근처 일대를 뜻하고, 이 주요 명소들이 2-3km 반경 내에 밀집해 있다 뿐이지 기실 시내가 속한 루앙프라방 주(province)는 서울의 30배의 크기에 달하니 '루앙프라방'이라 해서 다 같은 루앙프라방이 아니다. 꽝시폭포도 루앙프라방에 속해있긴 하지만 30km가 떨어져 있어 차로 1시간 정도는 이동해야 한다는 뜻이다. 이 루앙프라방의 속살을 스쳐 지나가는 여정 또한 도로를 따라 푸른 논과 밭이 펼쳐진 장관이므로 하나의 여행 코스로써 기꺼이 오를 만도 하다.
시내를 벗어나 민가가 드문드문 줄기 시작하면 곧 강을 따라 수풀이 우거지기 시작하고 넓은 평야와 푸른 밀밭이 연달아 나온다. 간간이 염소와 버팔로, 희멀건 민둥소들이 유유히 풀을 뜯고 있다. 포장과 비포장이 번갈아 이어지는 도로에 그마저도 곳곳에 파인 크고 작은 구멍들을 피해야 했으므로 풍경의 감상은 어디까지나 잠깐씩 뿐이었지만. (실제로 스쿠터를 끌고 꽝시폭포로 향하는 길엔 크고 작은 사고들이 목격되므로 누군가 시도한다면 운전에 유의하길.)
꽝시폭포에 도착하고서 스쿠터를 주차해 놓고 주차비로 5천 낍을 냈다. 꽝시 입장료는 25,000낍(약 1500원). 들어가기 전 로저와 잠깐 매점에 들러 요기를 했다. 나도 나지만 로저는 처음 보는 날 뭘 믿고 따라온다고 한 걸까. 로저와 나눴던 대화들은 많았지만 그는 그의 이야기를 곧잘 하지 않았기에 결혼은 했는지, 나이는 어떻게 되는지 굳이 묻지 않았다. 물에 들어가길 꺼려하는 로저를 부추겨 수영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물 밖에서 목이 빠져라 나만 기다리고 있으면 신경이나 쓰여서 수영을 할 수나 있었을까. 물속에서 이 끝 저 끝을 여기저기 쏘다니는 나와 다르게 로저는 허리까지 차는 얕은 뭍에서 물고기의 관심을 한 몸에 받으며 우둑하니 서 있기만 했다. 그건 또 그 나름대로 꽤나 불편한 일이어서 계속 신경이 쓰였기에, 어차피 찬 물에 오래 머물 수도 없고 남아있는 시간 동안 언제든 돌아올 수 있으니 흔쾌히 물 밖으로 나가 산책을 하자고 했다. 모자를 벗으니 머리카락 한 올 없는 창백한 백인 아저씨를 차디찬 폭포수에 머물게 할 만큼 내 성격은 모질지 않으니까.
조금 더 위로 걸어 길게 떨어지는 폭포수를 눈에 담고 산 위에 올랐다. 정상에 다다르니 커다란 나무를 기둥 삼아 골격으로 두고 그럴싸한 오두막을 세우고 있다. 로저는 그 많은 공사 자재들을 어떻게 여기까지 가지고 올라왔느냐에 대한 추측을 늘어놓더니 별안간 공사가 한창인 현장을 올라보고 싶단다. 어느 쪽으로 길이 났는지 끙끙대며 길을 찾다가 결국은 공사 인부에게 제재를 받고 나서야 포기했다. 그 아이 같은 호기심에 웃음이 났지만 곧 고개를 털어 생각을 지워버렸다. 여행은 누구든 어린아이로 만들지. 두 번 다시없을 경험 앞에서 체면 따위는 없다. 여행하며 지나치는 사람들은 그 누군가를 평가하거나 판단할 수 없다는 것을 안다. 노래하고 싶으면 노래할 수 있는 것이 여행이다. 로저는 자신의 여행을 하고 있구나.
로저의 기차 시간을 맞추어 곧 돌아와야 했으므로 내려오는 길 그대로 멈추지 않고 시내로 돌아왔다. 숙소에 도착한 후 스쿠터를 주차해 놓고 함께 저녁으로 신닷(Sin dat)을 먹었다. 신닷은 라오 전통 방식으로 중앙에 돔모양의 그릴 위에 고기를 굽고, 테두리를 따라 나 있는 홈에는 자작하게 국물을 담아 야채를 데쳐 먹는 음식이다. 저녁은 로저가 샀다. 자신의 하루를 구제한 나에게 고마움을 표시하고 싶다는 그의 말에 두어 번 사양했으나 사업차 누군가에게 식사를 대접하면 쌓이는 신용카드 포인트로 비즈니스 클래스를 타며 세계를 여행한다는 그의 말을 듣고는 넙죽 받아먹었다. 그걸 진작 얘기했어야죠. 하긴, 내가 그의 하루를 구제했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으니까.
저녁을 먹고 숙소에 들러 로저의 짐을 챙기고 배웅을 나갔다. 전용 뚝뚝을 150만 낍에 쾌척하고 떠나는 로저를 보자니 참 쿨하기도 하다. 나였으면 아득바득 100만 낍에 흥정을 했을 텐데. 우리는 몇 번이고 잘 가라고 손을 흔들고 이름을 불렀다. 길고 긴 평생 중에 한낱 반나절 함께 했을 뿐인데 아쉬움은 그에 비례하지 않는 모양이다. 지구 반바퀴를 돌아 만난 낯선 이와 평생 간직할 반나절짜리 추억을 만들 수 있는 곳. 그래, 여행은 모두를 어린아이로 만들지.
정답보다 이야기를 더 사랑하게 만들지.
만남과 헤어짐에 이유를 묻지 않게 하지.
영원보다 찰나를 믿게 하지.
그게 여행이 하는 일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