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는 전체주의보다 명확히 우수한 사회 조직의 형태이지만, 그건 사회적 차원밖에 나타내지 못해. 민주주의를 생명의 의미와 혼동하는 것은 생명을 죽이는 행위이며, 또 유일한 차원으로 생명을 축소시키는 거야. 나치당원과 공산당원이 서로 통하는 큰 과오도 바로 이것이지.
생명의 궁극적 의미를 파고들려면 우리들이 예술과 종교를 이해하기 위해 사용하는 것과 똑같은 기구, 즉 예술적 창조의 기구, 모든 창조의 기구를 사용치 않으면 안 돼. 이성은 생명의 궁극적 의미의 발전에 관하여 부수적인 역할밖에 못 하지. … 그러나 서구 기술 사회는 베토벤과 라파엘로를 수학적으로 이해하려고 기를 쓰고 있지. 그 사회는 인간 생활을 통계학적으로 이해하고, 또 그렇게 개선하려는 데에 열중하고 있어.
그러나 이러한 시도는 어리석을 뿐 아니라 비극적인 일이야. 그건 인간에게 아무런 구원도 가져오지 못하지. 인간의 생명을 사회적인 것과 자동적인 것, 그리고 기계의 법칙으로 환원했을 때 그것은 존재 가치를 상실해 버리지. 만일 생명으로부터 그것이 가진 의미―생명이 가진 독특하고도 완전 무상(無償)이며 또 논리를 초월한 유일한 의미―를 제거한다면 생명 그 자체는 사라지고 마는 거야. 생명의 의미는 완전히 개인적이고 내적인 거란다.
오래 전부터 현대 사회는 이 진리를 포기해 버리고, 절망적인 노력을 다해 빠른 속도로 다른 길을 향해 돌진하고 있지. 라인 강이나 다뉴브 강, 볼가 강의 물결이 지금 노예의 눈물로 파문을 일으키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인 거야. 이와 같은 눈물은 유럽의 모든 강변과 지구상의 모든 강둑을 흘러 나중에는 바다와 대양까지도 기술, 국가, 관료, 자본 등 인간 노예의 모든 고민으로 범람하게 될 거야.
결국 하나님이 벌써 몇 번이나 그랬지만, 인간을 불쌍히 여기실 거야. 그래서 마치 물 위에 떠 있는 노아의 방주처럼 정말 인간으로 남아 있는 몇몇 사람들이 이런 전체적이고 커다란 재앙의 물결 위로 떠오를 테지. 역사를 따라서 거듭 반복되듯이 인류를 구하는 건 바로 이 사람들이야. 그러나 구원은 참다운 인간, 즉 개인으로서의 사람들한테만 오는 거지. 이때 구원받는 것이 카테고리는 아니지.
교회도, 국민도, 국가도, 대륙도, 단체나 카테고리에 의해 인간을 구할 수는 없어. 오직 개인으로서의 인간만이 종교나 인종이나 그가 속한 사회적 또는 정치적 카테고리의 여하를 막론하고 구원을 받게 되네. 바로 여기에 사람은 결코 그가 속한 카테고리에 의해서 판단될 수 없는 이유가 있지.
카테고리는 인간의 두뇌가 산출한 가장 야만적이고 가장 악마적인 착오야. 우리들의 적 또한 인간이지 카테고리는 아니란 걸 잊어서는 안 돼.
-콘스탄틴 게오르규 <25시>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