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화는 좋은 이야기꾼이 되지 못한다. 실화는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전까지는 마구잡이로 뻗어 나가지만, 그러다가 이렇다 할 결론 없이 흐지부지 끝나는 경우가 허다하다. 어떤 흥미로운 상황이 빚어지는가 싶다가는 상황의 핵심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문제로 빠져버리며, 절정의 궤도로 올라가는 듯한 분위기 하나 없이 얼토당토않게 극적인 효과를 깎아 먹는다. 이런 것을 허구에 적합한 모델로 여기는 소설가 일파가 있다. 그들은 인생이 변덕스럽고 일관성 없는 것이라면 소설도 마땅히 그래야 한다고 말한다. 소설이란 인생의 모방이기에. 인생에서 사건이 두서없이 일어난다면 소설에서도 사건은 두서없이 일어나야 하며, 사건은 절정을 향해 가지 않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 그들이 들려주는 것은 이야기가 아니라 독자 스스로 고안하여 이야기로 만들어 갈 재료다. 때로는 뜸금없다고 생각될지도 모를 사건을 던져 놓아 그 의미를 독자가 알아서 추측해야 하는 경우도 있다. 그런가 하면 어떤 인물을 등장시켜 놓고는 거기서 끝인 경우도 있다. 나는 재료를 주었으니 요리는 독자가 알아서 하라는 식이다. 이것이 최근에는 소설을 쓰는 하나의 기법이 되었으며, 이를 통해 아주 좋은 소설이 나오기도 한다. 이 기법을 능수능란하게 구사한 작가가 체호프다. 이것은 장편소설보다 아주 짧은 단편에 더 적합한 방법이다. 대여섯 쪽 되는 이야기라면 작품의 분위기나 인물의 심리묘사로 독자를 붙잡아 둘 수 있지만, 50쪽이 넘어가는 소설에는 이야기를 받쳐 주는 뼈대가 필요하다.
내가 말하는 기법은 인생에서 호기심을 끄는 것, 인상적이고 극적인 인물이나 사건을 선택하여 담아내는 이야기 방식이다. 인생을 모방하려 들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독자가 그런 소리를 누가 믿느냐고 할 정도로 현실과 괴리되지 않도록 선을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 이야기로 다루기에 적당한 사실에서 뺄 것은 빼고, 어떤 것은 조금 바꾸거나 윤색하여 하나의 그림으로 완성하는 것이다. 이야기는 작가의 기질이 담기기에 어느 정도는 작가 자신의 초상이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독자를 자극하고 흥미를 일으키며 몰입시키기 위한 것이다. 그 의도가 성공하면 독자가 그 이야기를 진짜로 받아들인다.
-서머싯 몸 <어셴든> 서문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