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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류광호 Sep 10. 2018

싱글

1


장거리 비행을 마치고 인천공항에 도착한 어느 맑고 추운 11월의 오후, 승객이 거의 없는 서울역행 공항철도 열차에 몸을 실은 나는 나른함과 피곤함을 느끼며 살며시 찾아드는 졸음과 마주했다. 차창으로 스며드는 오후 두 시의 따스한 햇살이 선로 위를 미끄러지는 열차의 단조로운 소음과 함께 나의 졸음을 부채질하고 있었다.    


 

2


그때였다. 정차한 어떤 역에서 한 여성이 탔고 그녀는 내가 앉은 좌석 맞은편 자리에 와 앉았다. 인기척에 눈을 떠 그녀를 바라보았는데 순간 잠이 확 깼다. 그녀가 너무 아름다웠기 때문이다.     



3


스물넷, 아니 스물다섯쯤 됐을까? 어깨까지 오는 긴 머리카락과 까무잡잡한 피부, 뚜렷한 이목구비-어딘지 러시아 출신의 모델 이리나 샤크(Irina Shayk)를 연상케 하는-에 날씬한 몸매, 몸에 꼭 맞는 재킷과 매끈한 다리를 드러낸 무릎까지 오는 스커트를 입은 그녀는 내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내가 내 앞에 와 앉은 그녀에게 자연스럽게 시선을 주게 되었듯, 그녀도 곧 자신의 맞은편 자리에 앉은 나를 바라보았다. 우린 서로 눈이 마주쳤다. 매력적인 검은 눈이었다. 그녀와 난 잠시 서로를 바라보다 곧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하지만 그럼에도 우리 사이엔 왠지 서로를 의식하는 것 같은 기운이 맴돌고 있었다. 그 후에도 그녀와 난 몇 차례 더 눈이 마주쳤다. 비행기에서 자느라 헝클어진 머리카락이 원망스러웠다.     



4


그녀는 핑크색 케이스에 담긴 스마트폰을 꺼내곤 그것으로 무언가를 하는 듯했다. 난 창밖을 바라보다 그녀를 훔쳐보다 눈을 감았다 하며 이 생각 저 생각을 했다. 


‘그녀가 내리는 역에서 따라내려 말을 걸어볼까? 그런데 무슨 말을 하지? 그녀가 나를 이상한 사람으로 보진 않을까? 그렇지만 그녀는 정말 예쁘다. 꼭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다. 뭐라고 첫 마디를 꺼낼까? 저기요. 저… 잠깐 시간 있으세요? 너무 진부하다. 잠깐 저랑 얘기 좀 하실 수 있으세요? 이것도 아닌 것 같은데…….’


이런 생각들을 이어가다 감은 눈을 떠 그녀를 바라보았는데 그녀는 어느새 스마트폰을 집어넣은 채 나와 마찬가지로 눈을 감고 있었다. 잠이 든 걸까? 아니면 나처럼 뭔가를 생각하고 있는 걸까? 


눈을 감은 그녀의 얼굴 위로 부드러운 사과빛 햇살이 반짝이고 있었다.    



5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의 머리가 옆으로 살짝 기울었다. 가벼운 졸음이 그녀를 정복한 것이다. 그렇게 잠든 그녀가 귀엽게 느껴졌다. 깨어있을 때의 도시적이고 세련된 아름다움과는 또 다른 순수함.


그렇게 평온하면서도 가슴 뛰는 시간이 조금 더 지나자 열차는 내가 내려야 할 홍대입구역에 도착했다. 나는 아직 잠들어 있는 그녀를 두고 내리지 않기로 결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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