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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류광호 Feb 11. 2019

고독

틈틈이 틸리히의 설교집을 읽고 있는데 상당히 흥미롭다. (설교에 대해서 ‘흥미롭다’고 말하는 것이 부적절하게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사실 인간이란 경건한 것에서부터 저열한 것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것들에서 흥미 또는 무덤덤함을 느끼는 존재이지 않은가?) 


그의 글은 대단히 관념적이고, 철학적인데 그런 지성적인 시각으로 ‘신앙’에 대해 고민하는 것이 어딘가 나의 성향에 부합하는 측면이 있는 것 같다. 


각설하고, 지금부터는 그의 설교집 <영원한 지금>에 나오는 설교 ‘쓸쓸함과 외로움’ 중 인상적인 문장을 옮겨보기로 하겠다. 


사람은 사람이기 때문에 홀로입니다. 


산다는 것은 한 육체, 다른 모든 육체로부터 분리된 하나의 육체임을 뜻합니다. 그리고 분리되어 있다는 것은 홀로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모든 피조물의 진리입니다. 다른 어떤 피조물보다 인간에게는 더욱 큰 진리입니다. 인간은 홀로일 뿐 아니라 그가 홀로임을 ‘알고’ 있습니다. 인간은 자기가 무엇인지를 깨닫고 자기의 고독에 대해서 질문을 합니다. 


인간은 이 외로움에서 도피할 수도 없습니다. 


남녀는 서로 바라봅니다. 그리고 서로 열망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서로가 낯선 사람들임을 깨닫게 됩니다. 


나는 많은 사람들에게 에워싸여 있으면서, 갑자기 나의 궁극적인 고립을 깨달았을 때만큼 쓸쓸함을 느낀 때는 없었습니다. 


나는 군중 속에서 자기의 위치를 확보하면서 궁극적인 고독 속의 두려움을 체험하고 있는 강한 사람들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사랑하며 사랑을 받기 위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사랑이 거절되기 때문에 쓸쓸함을 느낍니다. 


다른 사람을 향하여 소망함으로써 곧 절망하게 됩니다. 


사실 우리는 궁극적으로 홀로입니다. 그리고 다른 방향으로부터의 사랑이나 우리 자신의 사랑의 힘으로도 이 무거운 짐을 우리에게서 옮길 수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감출 수도 없고 도피할 수도 없는 고독의 두 가지 형태가 있습니다. 그것은 죄책의 고독과 죽음의 고독입니다. 


죽음의 예속 속에 우리는 홀로입니다. 다른 사람과의 어떠한 사귐도 죽음을 제거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때때로 우리를 군중으로부터 불러내어 우리가 원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우리를 붙잡는 고요로움에 인도해 주십니다. 


하나님은 인생의 신비가 나타나는 존재의 한계선까지 이를 것을 요구하십니다. 그리고 이것은 오로지 외로움의 순간에서만 나타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은 고독의 시간에 무엇인가 우리에게 이루어 집니다. 우리 존재의 중심, 즉 우리 고독의 터전에 있는 가장 깊은 내가 하나님 안으로 인도됩니다. 하나님 안에서야말로 우리는 우리 자신을 잃는 일 없이 쉴 수가 있습니다. 


영원을 마주보기 위해서, 타인을 발견하기 위해서, 내가 내 자신을 보기 위해서-우리는 담대히 고독할 수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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