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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계 May 16. 2020

만학도,  나의 도전기

    서른아홉 살, 만학도가 되고 싶어서 oo대학교 문예창작학과를 노크했을 때는 한여름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고 있을 때였다. 암으로 위를 절제하고 시한부 삶을 극복하며 작은아이까지 낳았는데 어떻게 하면 좋은 엄마가 될 수 있을까 모색하다가 독서지도와 논술지도에 눈을 떴다. 그 과정에서 아이와 함께 동화책을 읽었고, 그저그런 동화가 눈에 띄었으며, 나도 쓸 수 있겠다는 멈추지 않는 자신감에 도전하여 동화작가가 되었는데, 막상 되고 보니 그 이름이 영 몸에 맞지 않는 명품 옷처럼 불편했다. 아는 게 없었기 때문이다.  


   본격적인 창작공부를 하고 싶다고 찾아간 나에게 소설가 ooo 선생님은 수능시험을 보라고 하셨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지 20년이 지났는데, 게다가 여상을 졸업했는데, 시험을 볼 자신이 없다고 말씀드렸더니 4년제 대학교에 입학하려면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관문이라고, 내가 MBC창작동화 대상 수상자여서 특기생 전형에 해당된다고, 수능성적이 저조해도 된다고, 도전하라고 격려하셨다. 수능시험 원서 마감 이틀 전이었다.


   수능시험, 도저히 치를 수는 없는데, 아는 것이라고는 아이들 독서지도를 위해 읽은 동화책이 전부인데, 앞이 깜깜했다. 그래도 특기자 전형이라니, 교과서 밖에서 많이 나온다니, 혹시 행운이 따라줄지도 몰라, 하는 생각에 사진을 찍고 대전여상으로 향했다. 교무실에 들어가는데, 성적증명서를 떼고 원서를 쓰는데 진땀이 났다. 


   시험 보는 날, 고사장이 oo여중이었다. 여고 교문 앞을 지나는데 운동장에 학생들이 정렬해 있는 게 보였다. 아, 저기구나, 서둘러 운동장으로 가서 내가 서야할 줄을 확인하는데 아무리보아도 내 번호에 해당하는 줄이 없다. 이상하다, 두리번거리다가 안내하는 선생님께 수험표를 내밀었다. 여중은 옆 건물이라고 한다. 


   서둘러 울타리를 넘어 여중으로 갔다. 운동장이 텅 비어있었다. 학생들이 이미 입실한 것이다. 내 번호를 확인하고 교실을 찾느라 복도를 돌다가 겨우 찾아 들어갔을 때 수험생들은 교실 가득 조용히 앉아 있었다. 급한 마음에 드르륵 교실 문을 열었더니 하필이면 앞문이었다. 자리에 앉아 있던 학생들이 자세를 바로하면서 시험볼 채비를 하며 나를 쳐다본다. 감독관인 줄 아는 모양이었다. 그런 학생들의 시선을 외면하고 내 번호가 적힌 책상을 찾아 들어가는데 얼굴이 화끈거리고 몸이 달아올랐다. 자리에 앉으니 아이들의 시선도 따라 앉는 것 같아 꼼짝도 할 수 없었다.


   120점이 만점인 언어영역 시간, 시험지를 받아든 나는 깜짝 놀랐다. 시험문제가 이런 거라니, 한 문제씩 풀어가는데 신명이 났다. 공부할 엄두도 못 내고 특기자 전형이라는 운만 믿고 도전했는데, 모르는 문제가 하나도 없었다. 아이들 독서지도를 위해 책을 읽고 신문을 읽고 필사했던 것들이 큰 바탕이 되었다.

   둘째 시간 수리시험에서는 첫째시간과 정 반대의 현상이 나타났다. 내가 풀 수 있는 문제는 딱 세 문제였다. 그것도 정답 근사치까지 낼 수 있었는데, 4지 선다형이라서 맞힐 수 있었다. 외국어 시간에는 도무지 모르겠는데, 듣기 평가문제는 감각으로 알 것 같았다. 확인해보니 15문제 중에서 13문제 맞혔다. 탐구영역에서는 그냥 찍어서 몇 문제를 맞혔는지 알지 못한다.


   그날, 점심 도시락을 싸온 두 살 위 언니가 말했다, 공부가 지겹지도 않느냐고. 나는 고개를 저었다. 지겨울 만큼 공부를 해 본 기억이 없기 때문이었다. 사실 반에서 1,2등을 다투던 언니는 공부가 지겨웠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마음잡고 공부를 해 본 적이 없으니, 그것이 나를 만학에 도전하게 했는지도 모른다. 


   수능시험을 보는 용기를 내기까지는 참으로 어려웠으나 막상 도전하고 보니 그 물꼬는 학부 4년을 마치고 대학원으로 이어졌다. 시작이 반이라는 말은 그런 걸 의미하지 않을까. 아직도 수능시험장에서 나를 바라보던 스무 살 아이들의 눈빛, 입학식이 거행된 운동장에서 함께 정렬했던 신입생들과 마주친 눈빛, 수업시간에 동연배의 교수님들 눈에 띄지 않으려고 애쓰던 일들 모두가 생생하게 떠오른다. 많은 용기가 필요했지만 그 도전 덕분에 나는 98학번을 달고 만학도가 될 수 있었고 두 아이들에게 도전하는 엄마 모습을 보여줄 수 있었다. 


   책가방을 들고 다니던 시간, 봄이면 야속하게 찾아오는 춘곤증으로 점심을 굶어야 했고, 위암 수술 후유증인 빈혈로 힘들기도 했다. 그래도 집으로 돌아와 식탁에 앉으면 아이들과 나는 학교에서 배운 것들을 자랑하기에 바빴다. 새롭게 알게 된 것들을 서로에게 들려주고 싶은 것이다. 덕분에 우리는 서로에게 스승이자 제자가 되어 앎의 기쁨에 빠져서 행복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고 과외를 시키거나 학원에 보내지 않아도 아이들은 무난하게 대학으로 진학했다. 당시 초등학교 5학년이었던 큰아이는 교육계에서, 1학년에 입학했던 작은 아이는 행정계에서 일하면서 맡은 일에 충실하면서도 계속 공부하는 것은 그때부터 생긴 버릇일 터였다.


   “엄마, 만약에 내가 결혼해서 아이를 낳으면 엄마가 키워줄 거야?”


교사인 딸아이가 내게 한 질문이다. 기다렸다는 듯 내가 대답했다.


   “너를 키우면서 내가 얼마나 행복했는데, 네 행복은 네가 누려야지 내가 뺏을 순 없을 거 같아.”


  딸아이가 웃더니 두 번 다시 묻지 않는다. 사실이다. 나는 두 아이를 키우면서 진실로 행복했다. 그 행복을 여기 열거하면 팔불출이 될 거 같아 삼가지만 내일을 알 수 없다는 건, 미래를 알 수 없다는 건, 우리에게 두려움도 주지만 희망을 주고 꿈도 준다. 내일을 모르기에 오늘을 열심히 살아갈 수 있는 것 같다.


   스물아홉에 위암으로 시한부 삶을 살던 내가 투병생활 중에 작은 아이를 낳고, 동화작가가 되고, 서른아홉에 만학도가 되어 대학교에 입학할 것을 어찌 짐작이나 할 수 있었을까. 위암 당시 17개월이었던 딸아이를 조금만 더 키우게 해달라고 기도하던 시간이 있었는데, 주어진 시간 좋은 엄마 노릇을 할 수 있게 해달라고, 엄마가 없어도 살아갈 수 있는 아이로 키우게 해달라고 눈물로 기도하던 시간이 있었는데, 이후 엄마 소리를 들으며 아들도 낳고 30년 넘게 행복하게 살았다. 살아간다는 건 사랑하는 일이고 환희이며 축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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