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화장한 얼굴보다
쌩얼이 더 예뻤다(과거형이다).
무슨 멍멍이 소리인고 하니
짙은 이목구비 때문에
왠만한 화장은 떠서 어울리지 않았기에
쌩얼이 차라리 나았다는 말이다.
화장해봐야 의미 없단 사실은
꾸밈을 대충 하며 살기에
좋은 핑곗거리가 되었고
그간 참 편하게 살아왔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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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주말.
사라지지 않는 베개자국이 신경쓰여
간만에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 보니
거울 속엔
BB라도 바르지 않으면
병색이 그득한 도시인이 존재했다.
올라갔던 눈꼬리는 쳐지고
눈 밑 주름은 옆으로 더 퍼지고
피부는 칙칙한 동시에 물컹, 혹은 흐물?
오... 마이... 갓...
며칠 전 본 심리학 책에서
30대 초부터 노화가 시작되며
후반엔 middle age crisis가 나타난다던데
내 얼굴이야말로 총체적 위기(crisis)였다.
ㅡ
아침에 아이 챙겨 나가기 바쁘고
종일 컴퓨터에 코 박고 일하기 바쁘고
퇴근하면 먹고 자기 바빴던 지난 몇 년이
고스란히 몸의 흔적으로 남았던 것이다.
(얼굴도 몸의 일부이니.)
개인의 재정적 고민을 들어 주고
법인의 경리3이 되어 일했던 날들 속에
곱게 늙고 싶다 생각했던 20대의 바람은
기억 저편의 신화로만 존재하는 현실.
ㅡ
아... 억울했다.
요즘 언론에서 노화가 10년 늦어졌다며.
그래, 연예인들은 젊기만 하던데.
후, 나는 화장도 잘 할줄 모르는데.
이런 날이 이렇게 빨리 올 줄 몰라
어울리는 화장법 찾을 생각도 못했고
돈 아낀답시고 피부과를 가거나
마사지 한 번 받을 생각은 절대 못했잖아.
ㅡ
아쉽지만
지금이라도 천천히 늙을 방법을
찾을 수 있다면 찾고 싶었다.
누구에게 잘보이려고가 아니라
그냥 여성으로써 나의 만족을 위해서.
가장 쉽고 빠른 방법은 뭘까 생각하다
운동으로 생기를 끌어 올리기로 했다.
마통만 영끌이냐! 생기도 영끌!
시술과 관리는 아껴둘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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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영원히 이용하지 않을 것 같던
아파트 단지 내 헬스장에 처음 간 날.
밤 10시가 넘은 시간에도
사람들의 러닝머신은 분주했고
난 그들을 보는 것 만으로
뭔가 해낸 것 마냥 엔돌핀이 돌았다.
작심삼일로도 오지 않던 헬스장에
노화를 유인으로 와 있다니 참 별일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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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 점심시간에
갑자기 운동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부장님 동네 헬스장에는
새벽부터 연예인들이 운동중이란다.
지금 성수기인 연예인들 말고
한때 인기 많았던 옛 청춘스타들 말이다.
몸 관리를 요구받지도 않을 그들이
아직까지 전성기때처럼 운동을 하는 건
운동이 준 좋은 경험치 때문이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문득 스쳤다.
무너진 위기의 얼굴 덕분에
좋은 습관 하나 얻을 수 있다면
그래, 그렇게까지 억울해하진 말자.
대신, 이젠 나한테도 관심을 좀 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