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
내일 당장 죽어도
아깝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잠이 들었다.
내일 당장 세상이 없어져도
무섭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꿈을 꾸었다.
이렇게 죽어도
세상이 없어져도
아무런 후회가 없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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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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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할 것도 없었다. 나에게 남은 것은 지난달 월급에서 생활비를 쓰고 남은 돈 몇 만 원과 2년 치 학자금 대출,
계산해보니 플러스보다 마이너스 금액이 더 많았다.
당장 죽어도 손해 볼 것은 없었다. 찬장을 열어보니 지난달 마트 1+1 행사하던 날에 가서 사 온 참치캔 두 개와 매운맛 3분 카레 하나, 신라면 소컵 하나가 남아 있었다. 그 밑에는 유통기한이 두 달 정도 지난 고양이 간식이 몇 개월간 방치되어 있었다. 버려야 하는데 어쩐지 손이 가질 않았다.
내가 키우던 러시안블루 고양이 '사비'는 설날 연휴 때 무지개다리를 건넜다. 생각해보니 벌써 3개월이 지났다. 그날도 습기 많고 퀴퀴한 7평짜리 반지하 셋방에서 사비와 함께 있었다. 월세가 비교적 저렴한 독산동 382번지 총각네 마트 골목 두 번째 빌라에서 우린 서로를 의지하며 하루하루를 버텨냈다. 고양이를 키울 수 있다는 조건 하나만 보고 들어온 집이었다. 웬만한 집주인들은 하나같이 애완동물을 절대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에
집을 구하는 게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 집 주인은 저렴한 월세에 고양이까지 허락해 준 고마운 분이었다. 다만 번호키가 없는 문이라 조금 불안하긴 했지만, 나름대로 참고 지낼만했다. 넓고 쾌적한 환경에서 커야 할 '사비'에겐 너무 미안한 일이었지만, 함께 있기 위해선 다른 방법이 없었다. 지금 내가 가진 돈에 '집사'라는 조건을 더하면 서울 어디에서도 방을 구하기가 힘들었다.
가장 큰 문제는 당장 써야 할 생활비가 없다는 것이었다. 이번 달 월세도 문제였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고양이 사료와 모래값이 들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한 달에 월세니 뭐니 주기적으로 들어가는 돈만 해도 백만 원가량. 월급의 2/3가 통장에 발도장만 찍고 그냥 빠져나갔다. 생활비도 없는 주제에 회사나 꾹 참고 다닐 것이지, 난 그새를 못 참고 1년을 채우자마자 인수인계도 하지 않은 채 회사를 뛰쳐나왔다. 쉰내 나는 쉰 살 넘은 이 부장의 노골적인 추행에 나도 모르게 고함을 지르고 뺨을 때렸다. 웃긴 것은 이번이 처음도 아닌데 여태껏 잘 참다가 마지막에 터져버린 것이다. 더럽고 징그러운 놈이었다. 자리에 앉아 일을 하고 있으면 꼭 옆자리로 의자를 갖고 와선 등을 쓰다듬고 허벅지에 손을 올려놨다. 온몸에 송충이가 기어 다니는 것처럼 소름이 돋아 손가락 털까지 곤두섰지만 몇 번이고 참고 넘겼다. 아무리 생각해도 바보 같은 행동이었다. 내가 입을 다물고 있을수록 그놈은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며 그 수위를 높여갔다. 등에서 허벅지, 팔... 이제는 하다못해 나를 접대부 취급하며 들이대는데 그 미친놈에게 내가 아는 온 세상의 욕을 다 퍼부어주고 싶었다. 하지만 내겐 경찰에 신고할 용기도, 마누라에게 전화할 용기도 없었고 그저 나 스스로가 똥통에서 발을 빼는 방법밖엔 없었다.
가산디지털단지역 근처 중소기업 경리로 1년간 일을 했다. 한 달에 160만 원을 받지만 4대 보험을 제하고 나에게 들어오는 돈은 150만 원이 채 되지 않았다. 좋지도 싫지도 않았다. 그냥 나를 받아주는 것만으로도 감사히 생각하고 다닐 요량이었다.
저축 따윈 꿈도 못 꾸고 입에 풀칠만 하고 살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쉰 살 넘은 이 부장과 올해로 환갑이 된 심 대표_
하루 종일 나가서 들어오지 않는 영업담당 김대리
그리고 나
이렇게 4명이 이 회사의 전부였다.
이젠 내가 없으니 3명,
아니 그새 또 직원을 뽑았을지도 모르지
꽃피는 5월의 한가로운 평일 오후_
일자리도 찾아볼 겸 근처 PC방으로 가던 길이었다.
새로 생긴 꽃집이 눈에 띄었다.
간판을 언뜻 보니 이름이 특이했다.
<아재 꽃집>
뭐지?
꽃집 주인이 아저씨인가?
피식 웃으며 꽃집 앞을 지나가는데
문 앞에 붙어있는 글귀가 눈에 들어왔다.
'안개꽃 꽃다발 전문'
안개꽃 꽃다발엔 다른 꽃은 일체 들어가지 않는 모양이었다.
평소 안개꽃을 참 좋아했다.
다른 꽃들을 받쳐주는 역할을 많이 하지만
화려한 장미나 백합보다 안개꽃이 좋았다.
눈에 띄지 않으면서 소박하고 잔잔한 느낌이 어쩐지 내 인생과도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별다를 게 없는 밋밋한 인생이었다.
'아니, 안개꽃만큼만 살아도 참 좋았겠지.
안개꽃이 없는 꽃집은 없으니
그만큼 찾는 이들이 많다는 이야기일테고...'
안개꽃도 나에겐 과분했다.
그러다 갑자기 나 자신이 초라해졌다.
어쩐지 내 인생을 꽃에 비유하는 건 적절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꽃은 그 자체로도 아름다우니까
꽃을 싫어하는 사람은 없을 테니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한참을 멍 때리고 서있는데
40대 중반으로 보이는 아저씨가 앞치마를 맨 채 꽃집 문을 열고 나와 대뜸 말을 걸었다.
'안에 들어와서 꽃구경할래요? 구경하는덴 돈 안 들어요.
실컷 꾸며놨는데, 주인이 아저씨라 그런가 아무도 구경하러 안 오네.
예쁜 꽃 많이 가져다 놨는데...'
턱수염이 제법 북실 거리는 아저씨의 남다른 비주얼에 흠칫 놀랐지만,
'잠깐 구경만 하는 건데 뭐 어때'라는 생각이 스쳐 천천히 아저씨를 따라 꽃집 안으로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