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유튜브 알고리즘을 위한 변명
낱말 도깨비3
"유튜브 디톡스라고 들어봤냐?"
아침부터 연수가 있어 한 시간 일찍 출근한 날, 연수가 끝나자마자 팀장님이 대뜸 물어보셨다. 들어봤을 턱이 있나. 그게 뭘까?
"아니요, 따로 못 들.."
전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따로 들어본 적 없다고 대답하려는 찰나 팀장(님)이 내 표정을 보고 대뜸 말을 끊고 지시를 내렸다. 그거 알아보고 자기 스마트폰에 설정 좀 해달라고. 아침은 정말이지 바쁘다. 먼저 업무일지를 써야 하고, 그 외에 아침마다 해야 하는 루틴 업무도 많다. 자기 유튜브 계정의 디톡스인지 뭐시기를 왜 이 바쁜 아침 시간에 내게 시키는 걸까. 그래도 아침부터 괄괄한 성격의 팀장(님 생략)이 괄괄한 목소리로 질러대는 독촉에 시달리고 싶지 않았기에 당장 구글에 검색부터 해봤다. 유튜브 계정의 사전 시청기록을 삭제하고, 추후에도 시청기록을 저장하지 않도록 설정함으로써, 알고리즘에 의한 영상 추천을 멈추는 것을 디톡스라고 한단다. 설정은 어렵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바로 팀장에게 스마트폰을 달라고 하고 유튜브를 켰다.
롤렉스, 톰 브라운 같은 명품에 관한 영상들, 여행지에 대한 영상들, 흑백요리사 예능 프로에 대한 잡설들.. 그 외 잡다한 여러 가지가 영상 목록에 올라와있었다. 디톡스. 해독이란 뜻이다. 독소를 뺀다.. 독소, 독소. 이 용어에 따르면, 이 추천 영상들은 분명 팀장의 취향이고 흥미면서 한편으론 제거해야 할 독소인 것이다. 그 아이러니가 주는 미묘함을 뒤로한 채 설정을 마치고 팀장에게 스마트폰을 다시 건넸다.
"내가 볼 영상을 왜 유튜브가 정해준다는 거야. 이제야 추천영상이 안 뜨네. 좋아, 좋아. 잘했어."
네, 저도 제가 선택한 건 아니지만, 팀장님의 업무 외 지시 짬 때리기 대상자는 항상 저인걸요. 그렇게 속으로 볼멘소리를 하며 늦어진 아침 업무를 정리했다.
나는 문득 내 유튜브 계정을 떠올렸다. 구독설정을 해둔 수많은 역사 영상 채널들, 게임 유튜버의 방송 채널 몇 개, 철학 교수와 강사들의 강의 채널이 두어 개, 생물 해부영상을 보여주는 과학 채널 하나. 처음 유튜브 계정을 만들었을 때, 몇 번의 검색과 구독을 했다. 이를 기반으로 추천해 주는 비슷하고 비슷한 영상들에 좋아요와 구독을 누르며 내 추천영상 목록은 위와 같이 채워졌다. 나의 관심사는 이런 것이다-하고 보여주듯 채워진 추천영상 리스트는 과연 온전히 나의 선택이라고 할 수 있을까. 물론 인간의 취향과 흥미엔 어느 정도 관성이 있는 법이나, 이런 식이라면 개인의 취향과 선택이란 것도 실은 유튜브 알고리즘에 의해 알게 모르게 강요된 것은 아닌지, 이를 온전히 내 선택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인지 걱정스럽다. 어떤 점에선 한낱 AI에 불과한 유튜브 알고리즘이 나의 사고를 조종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소슬한 상상도 해봤다. 그래서 점심 먹고 내 시청기록을 살펴보고, 영상기록 삭제 창을 켰다. 자, 이대로 대상기간을 전체로 설정하고 삭제버튼을 누른다. 삭제 의사를 재차 확인하는 메시지가 나온다. 지우면 다시 복원할 수 없음이다. 그래서 망설였다. 점심시간이 끝났기 때문에 나는 일단 다시 자리에 앉아 일을 시작했다.
결론부터 얘기하면 내 시청기록은 삭제되지 않고 안녕히 잘 있다. 팀장님 덕이다. 명품에 대한 시청기록을 모두 삭제해 드린 그날 저녁, 당신께서는 퇴근 30분 전부터 '빠떽 삘립(명품 시계 브랜드 파텍 필립을 늘 이렇게 발음하신다) 노틸러스 모델이 면세점에서 얼마 하는지 아냐'는 질문으로 시작된 일장 수다로 퇴근 앞둔 팀원들의 진을 다 빼버리셨다. 자, 시청 기록을 지우고, 추후 기록 중지를 설정했으니 팀장님이 명품에 대한 영상 시청하기를 그만두실까. 절대 그렇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거의 운명적 확신이다. 나는 팀장님만큼 명품을, 명품 얘기를 좋아하는 사람을 본 역사가 없다. 이게 한낱 알고리즘의 강요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빠떽-삘립의 장구한 역사와 가치에 대한 팀장님의 일장 연설은 알고리즘이 아무리 추천을 열심히 하더라도, 결국 인간의 흥미라는 것은 각자의 선택으로 결정된다는 결론 앞에 날 내려놓았다. 지칠 줄 모르고 명품 얘기를 하시는 팀장님을 보며, 나는 그만 나의 모습을 대입하여 보고 만 것이다. 유튜브 디톡스를 하고, 당장 그날 저녁 명나라 흥망성쇠에 대한 영상을 밥반찬 삼아 식사를 할 나의 모습.
그래, 취향과 흥미는 결국 내가 한 선택이다. 누군가에게 배워서 알게 되고 좋아하게 된 것들이다. 그러니 온전히 내 안에서 생긴 것은 아니고, 외부에서 흘러들어와 형성된 것이라고 하겠으나, 그게 나쁠 것은 또 뭔가? 모름지기 세상에 외따로 고유한 것은 없다. 생각해 보면 나부터가 이미 세상에 있던 것들이 섞여 만들어진 존재다. 살아가면서 날 이루는 것들의 배합을 정할 선택권이 내게 있을 뿐, '완전히 고유한 것만으로 이루어진 나'는 존재하지 않는 환상이다. 그래서 나는 온전한 나를 찾기 위해 명상을 한다, 혹은 여행을 간다는 식의 얘기를 잘 믿지 않는다. 그렇게 보면 알고리즘은 날 만들어갈 재료를 가져다 쓰기 좋게 앞에 놓아주는 하인일 뿐 굳이 제거해야 할 대상은 아니다. 물론, 내 취향과 흥미가 앞으로도 유튜브가 정해주는 알고리즘에 따라 고정될 수 있다는 점이 불편할 순 있다. 그렇다면 가끔 조금 색다른 검색어를 준비해보면 될 일이다.
"와, 유튜브로 찾아보니까 파텍 필립은 기본 1,400만 원부터 시작하네요. 지금 보니 차고 계신 모델이 노틸러스 아니에요?"
"어어, 뭐 내가 산건 아니고, 알다시피 우리 형이 사업하잖아. 그래서 어찌어찌 선물로 받..(생략)"
싱글벙글 웃으며 말씀하신다. 팀장님이 이를 보이며 웃게 할 질문을 하기 위해, 그렇게 내 유튜브 검색 기록엔 전혀 인연 닿을 일 없는 검색어가 새로 쓰였다. 이런 사건이 아니었으면 찾아볼 일 없었을 시계 리뷰 영상이 나름 신선하다. 무슨 놈의 시계가 1,400만 원이나 할까. 다만 구독은 하지 않았다. 암만 그래도 내 손목에 1,400만 원짜리 시계를 채워놓는 그림은 내 취향 밖의 일이기에. 빠떽 삘립이 채워진 손목을 휘저으며 명품 얘기를 하는 팀장님을 보니 팀장님에겐 그 시계가 그래도 퍽 잘 어울린다는 생각도 들었다. 대저 명품은 뽐내고자 하는 이가 소유하게 되는 법이니. 본인이 그렇게도 좋아하시니 이러나저러나 아무래도 좋은 일 아닐까. 시계가 반짝반짝한 게 그래, 예쁘긴 하네. 그나저나 그놈의 유튜브 디톡스- 정말이지 괜히 해드렸다.
[+] 도깨비 주머니
괄괄하다① : 성질이 세고 급하다.
괄괄하다② : 목소리 따위가 굵고 거세다.
짬때리다 : 일을 다른 사람에게 떠 넘기는 것.
볼멘말투 : 서운하거나 성이 나서 퉁명스럽게 하는 말투.
소슬하다 : 으스스하고 쓸쓸하다.
장구한 : 매우 길고 오래다
모름지기 : 사리를 따져 보건대 마땅히. 또는 반드시.
외따로 : 홀로 따로.
대저 : 대체로 보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