① 모든 차의 운전자는 같은 방향으로 가고 있는 앞차의 뒤를 따르는 경우에는 앞차가 갑자기 정지하게 되는 경우 그 앞차와의 충돌을 피할 수 있는 필요한 거리를 확보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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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차할 때도 앞차바퀴가 뒷바퀴가 슬쩍 보이게끔 간격을 유지해라.’
운전을 배울 때 아버지가 차간 안전거리에 대해 해 주신 말씀이다. 당신께선 성품이 온화하신 분이지만 안전거리를 지키지 못할 때면 되우 신경이 날카로워지셨다. 한갓 습관이 아니라 안전이 달린 일이어서 그렇다. 차를 모는 것도 익숙지 않은데, 다른 차와의 간격까지 신경 쓰자니 운전은 내게 퍽 덧거친 일이었다. 때로는 너무 멀리 때로는 너무 가까이, 갈팡질팡하는 내게 아버지가 말씀하셨다.
”처음이라 어렵겠지만, 나중엔 자연스럽게 안전거리를 맞출 수 있단다.”
아버지의 연수에 힘입어서였을까, 나는 마음 급할 때도 안전거리를 퍽 잘 준수하는 운전자가 됐다. 안전거리에 있어서는 소위 말하는 모범 운전자의 태도를 가지게 된 셈이다. 도로 위에서는 그것으로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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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도의 중단세
중단의 겨눔은 모든 겨눔세의 가장 기본 되는 겨눔이다. 이 겨눔세는 공격이나 방어 또는 상대 기량의 변화에 대하여도 융통성 있게 대처할 수 있는 자세로, 검도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자세이다.
(출처 - 대한검도회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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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중단을 잘 잡으면 상대가 확 치고 들어올 수가 없어. 네 칼끝이 상대방 몸을 겨누고 있으니까.’
대학교 신입생 시절 가입했던 검도 동아리에서 주장이 중단세에 대해 해준 말이다. 중단은 검도의 기본이다. 칼끝으로 상대를 겨눔으로써 상대방이 나의 간격 안으로 쉽사리 들어오지 못하게 되고 상대의 공격을 방어할 수 있다. 운전이 그랬듯, 기본을 중시하는 나였으므로 나는 이내 제법 견고한 중단을 지니게 됐다. 그러나 이는 오히려 종종 주장이 나를 달구치게 하는 단점이 되기도 했다.
”머리를 쳐! 중단을 지키는 것으로 끝이 아니야. 어느 순간에는 상대방 간격 안으로 뛰어들어가서 머리를 쳐야지!”
그러니까 중단세로 간격을 유지해 ‘내 머리를 지켜내는 것’은 승리의 필요조건일 뿐 충분조건이 아닌 셈이다. 간격을 좁혀 상대의 머리를 쳐야 승리를 쟁취할 수 있다. 결국 승리의 아퀴는 과감한 한 걸음에 있는 것인데 나는 늘 이것이 부족했다.
삶에도 안전거리가 필요하다는 것은 그리 생소한 비유가 아닐 것이다. 신호등의 지시에 따라 흘러가는 도로 위 세상처럼, 세상사에 명확한 법칙이 있다고 믿으며 살아온 듯하다. 운전하며 자연스럽게 앞차바퀴를 확인하고 브레이크를 밟듯이, 인생 곳곳의 요소들 사이 길고 긴 안전거리를 두는 것이 나의 오랜 습관이었다. 나는 왜 모범 운전자로 살아왔나? 신호등의 존재를 믿었기 때문이다. 인생을 살아가는 일에 대해, 저기 구름 위 하느님께서 적확한 법칙으로 불 밝히는 신호등이 있을 것만 같은 느낌말이다. 그러나 시간 지나 다시 돌아본 삶은, 세상사에 그야말로 정답은 없다는 결론만을 가져왔다. 말하자면 나는 신호등을 믿었으나 실은 신호등 같은 것은 없었던 셈이다.
그런 점에서 먼저 지난날 동안 흘려보낸 관계의 문제가 아쉽다. 있는지 없는지조차 확실치 않은 '인간관계의 신호등'을 바라보느라, 안전거리보다 더 소중한 그 무언가가 될 수 있었을 많은 인연을 그저 스쳐 보냈다. 내 삶에서 마주친 수많은 타인은 그 마주침의 순간, 신호등이 아닌 나를 보고 있었을 것이다. 도로의 세계에서 차간 안전거리는 신호등이 정하는 것이나, 인간의 세계에서 간격은 타인과 내가 함께 정의하는 것이다. 신호등의 지시 아래 날카롭게 세워둔 나의 중단세를 보고 발길을 돌릴 수밖에 없었을 인연들이 안타깝다.
격식과 예의에 대해 뒤살피느라, 조금 더 솔직하게는 타인들로부터 내 세계를 온전히 지켜낼 궁리를 하느라 안전거리에 너무 연연했던 것은 아닌지. 안전거리는 물론 중요한 것이겠으나, 그것을 지키는 것이 인간관계의 궁극적인 목적은 아니었을 터다. 거리를 유지하는 데에 고민하기보다 거리를 좁혀낼 노력을 하며 살았다면 사람과의 관계에서 더 많은 것을 남길 수 있었겠다는 아쉬움이 남는다.
이에 더해 인생을 살아온 태도에도 아쉬움이 있다. 어느 나이엔 무엇을 이뤄야 한다, 무엇을 해선 안된다와 같은 무의미한 신호등에 너무 겁을 집어먹고 산 것은 아닐까. 삶에 신호등이 있다는 착각은 겁 많고 변수를 싫어하는 나의 기질과 맞물려서 내 삶을 끌어왔다. 모든 것이 준비됐을 때에야 무언가를 시작하려는 성격, 그렇게 함으로써 변수 없이 실수 없이 원하는 바를 편히 성취할 수 있을 것으로 믿는 안일함. 이것이 아쉽다.
물론 신호등의 파란불이 들어올 때 바로바로 출발할 수 있도록 나름의 열심을 통해 삶을 끌어왔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누구의 말이던가, 삶은 예측불허, 그리하여 생은 그 의미를 가지는 법이다. 변수를 두려워하는 마음이 과해 마땅히 해봤어야 할 도전을 외면한 것은 아닌지, 도전의 결실보다는 일상의 안녕만을 추구한 것은 아닌지 스스로 돌아본다. 열심히 지켜온 안전거리가 실은 유약함과 도피는 아니었을까.
물론 이런 반성은 지나치게 가혹한 데가 있다. 기껏 서른 해를 살아놓고 삶의 성적표를 쓰기는 군색한 일이다. 이제야 깨달았다면 지금부터 바꿔가면 된다. 그러니 나는 이 안전거리란 것이 대해 조금 더 씩씩한 태도를 가져야겠다. 좁혀도 보고, 종종 무시해보기도 하자. 쉬운 일은 아니겠다. 지금까지 살아온 생각의 틀을 바꾸는 일은 어렵다. 특히 나 같은 모범 운전사에겐 더욱 그렇다. 예컨대 누군가의 간격에 들어간다는 것, 또 나의 간격 안에 누군가 비집고 들어온다는 것은 유쾌하지 않은 일이 될 수도 있다. 이걸 유쾌하게 잘 해내는 방법론은 매번 명확히 알 수는 없는 일이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렇지만, 아무렴 어떤가? 도로 위의 충돌은 죽음이지만 인간 사이의 충돌은 사건이고 인연이다. 또한 새로운 도전은 아마 인생을 살아감에 있어 신호등이 정해주는 안전거리를 준수하며 살던 때보다 많은 고민을 불러올 것이고 뜻하지 않은 결과도 가져올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것도 아무렴 어떤가? 뜻밖의 상황이 오히려 내 삶에 밀도 있는 그림이 되어줄 수 있다.
그러니 파란불에 가고, 빨간불에 멈춰서는 정직함은 이제 충분한 듯하다. 그 정직함으로 일상에 무수히 찍어온 온점에, 부족했던 획 하나씩을 더 써넣자. 물음표도 좋고 느낌표도 좋다. 한 번 더 나의 일상에 액셀을 밟아보자. 중단을 깨고 들어가자. 이제는 머리를 칠 시간이다.
[+] 도깨비주머니
- 되우 : 아주 몹시.
- 한갓 : 다른 것 없이 겨우.
- 덧거치다 : 일이 순조롭지 못하고 가탈이 많다.
- 달구치다 : 무엇을 알아내거나 어떤 일을 재촉하려고 꼼짝 못 하게 몰아치다.
- 필요조건 : 어떤 명제가 성립하는 데 필요한 조건. 명제 ‘A이면 B이다.’가 성립할 때, A에 대하여 B를 이르는 말이다.
- 충분조건 : 어떤 명제가 성립하는 데 충분한 조건. ‘갑이면 을이다.’에서 ‘갑’은 ‘을’이 성립하는 데에 충분조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