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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방구석 ㅈ가 Feb 13. 2021

『책, 이게 뭐라고』 서평


1. About 책


동아일보와 한겨레가 교묘히 엉켜있다.


책의 분위기는 다소 냉소적이다. 비판적이며 날카롭다. 어떤 면에선 진보적이다. 반대로, 작가가 가진 것을 놓지 않으려는 모습, 좀 더 극단적으로 얘기하면 작가의 은근한 우월감도 보인다. 공대 출신으로 동아일보에 입사해서 한겨레 문학상으로 데뷔한 이력도 독특하다. 작가의 이력과 책에서 느껴지는 양극단의 성격을 고려하여, 위와 같은 비유를 해보았다. 단순 이분법에 따른 분류이며 정치적 의도는 없음을 밝힌다.


책이 강약 조절을 기가 막히게 했다. 책은 수 십 개의 짤막한 산문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가벼운 글과 무거운 글을 적절히 배치했다. 2-3개 가벼운 에피소드로 잽을 날리다가, 묵직한 생각거리 1개를 던져주며 훅을 날린다. 개인사와 세상사를 잘 섞어서 균형을 잡았다. 생각 거리만 던져주면 읽는 입장에서 피로감이 쌓일 텐데, 가벼운 이야기로 잘 풀어갔다.


내용적으론, 생각보다 보수적이라 놀랐다. 유일하게 읽은 작가의 책이 <표백>인데, 상당히 도발적이며 고발적이다. 그 이미지에 사로잡혀서 그런지 몰라도, 이 책에서의 작가는 내가 생각한 작가의 모습과 꽤나 달랐다. 




2. About 나


‘말하고 듣는’ 인간과 ‘읽고 쓰는’ 인간.


난 7대3 정도가 아닐까 싶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나는 순도 100% ‘말하고 듣는’ 인간이었다. 책 읽기를 꺼려하고(아직도 마찬가지다), 글보단 말로 내 의사를 전달하길 좋아했다. 2-3년 전에 우연찮게 글을 쓰기 시작해서, 쓴다는 행위가 생각보다 내 심신에 도움이 된다고 판단하여 아직까지 글을 쓰고 있다. 난 타고나게 즉흥성과 번뜩이는 재치가 부족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의사를 전달한 이후에 뒤돌아서 ‘아! 이렇게 얘기했어야 했는데!’ 를 되뇌이는 경우가 많았다. 글쓰기엔 이런 아쉬움이 없다. 이렇게 말했어야 했음을 되뇌이는 순간, 파일을 열고 글을 수정하면 된다. 내가 원하는 바를 장소와 시간의 구애없이, 온전히 내 속도에 맞춰 기록할 수 있다는 게 글쓰기의 매력이라 생각한다.


‘읽고 쓰는’ 인간의 비중이 커지면서 얻은 것이 있다면, 스스로를 기만하지 않게 됐다는 것이다.  정확히는, 과거보다 ‘덜’ 기만하게 되었다. 난 좋을 때보다 힘들 때 글을 쓴다. 무기력한 순간에 나를 위로할 수 있는 몇 안되는 도구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글쓰기는 나를 구체화시키는 작업이며, 내 생각에 책임감을 불어넣는 과정이다. 이 과정에서 추상적이었던 자아가 조금이나마 실체를 갖춘 모습으로 다가온다. 날 것의 나를 쳐다보는게 쉽진 않지만, 그래도 주어지는 건 많다. 때로는 성찰, 반성, 비판을 제공하고, 때론 확신, 자신감, 위로를 제공한다. 물론 이것들이 항상 좋은 거라고 확신할 순 없으며, 영원히 지속 되지도 않는다. 어느 순간 제공되는 양이 줄어들수도 있고, 혹은 한쪽으로 쏠릴 수도 있다. 주어지는 게 당근과 채찍처럼 균형 잡히기 위해선, 끊임없는 자기 검증을 거쳐 정직해져야만 할 것이다.




3. 줍줍 문장


말하고 듣는 사람 사이에서는 예의가 중요하다. 읽고 쓰는 사람 사이에서는 윤리가 중요하다. 예의는 맥락에 좌우되며, 윤리는 보편성과 일관성을 지향한다. 예의는 감성의 영역이며, 우리는 무례한 인간이 되지 않기 위해 감수성을 키워야 한다. 윤리는 이성의 영역이며, 우리는 비윤리적인 인간이 되지 않기 위해 비판 의식을 키워야 한다.


정치적 올바름을 둘러싼 논란의 상당수는 예의와 윤리를 혼동하는 데서 비롯된 것 아닌가 나는 생각한다. 예의와 윤리는 폭력을 줄이기 위한 두 가지 수단이다. 이 두 덕성은 서로 겹치지 않으며, 맥락과 상황의 문제(예의)를 보편적인 법칙(윤리)으로 만들고자 할 때 종종 충돌이 발생한다.


(조지 오웰을 얘기하며) ‘작가는 신념의 총폭탄이 돼야 한다’는 뜻이 결코 아니었다. 그것은 ‘작가는 정직해져야 한다’는 의미였다.


‘어느 누구도 배제하지 않는 공동체’라는 말은 얼핏 듣기에는 아름답지만 순진하고 낭만적인, 그리고 불가능한 환상이다. (중략) 그럼에도 우리는 ‘누구도 배제하지 않는 공동체’란 표현을 좋아한다. 아니, 거의 사랑한다. 배제당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너무 커서 그런 것 아닐까. 그래서 ‘우리는 가족’이라는 말도 그렇게 좋아하나 보다. 그 말을 들으면 안심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 최인철 교수의 <굿 라이프>를 읽고 독서 토론을 하는 자리에서라면, 누구나 쑥스러워하지 않고 자신이 생각하는 좋은 삶에 대해, 인생의 가치와 행복에 대해 말할 수 있다. 아니, 말하게 된다. 그런 생각을 누군가 경청해주는 것은 대단히 감동적인 경험이고,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은 점점 말이 많아진다. 생산적인 대화가 오간다. 책은 우리가 진지한 화제로 말하고 들을 수 있게 하는 매개체가 되어준다. (중략) 사람들 앞에 책이 있고, 그 책 역시 말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책은 고집스럽게 한 가지 주제를 이야기한다.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은 책이 묻는 질문에 답변해야 한다. 책은 우리의 대화가 뒷담화로 번지지 않게 하는 무게중심이 되어준다.


나로 말하자면 첫인상 때문에 오해한 사람의 진가를 나중에 깨달은 적이 너무 많았다. 다른 사람의 진심이나 역량을 단숨에 간파하는 능력보다는, 표정이나 목소리로 상대를 판단하려 들지 않는 신중함과 겸손함을 얻고 싶다. 


윤수영 대표는 트레바리 자체가 사람들의 독서 경험을 확장시키는 일을 하는 회사라고 설명했다. 사람들이 혼자서는 읽지 않았을 책을 읽게 만들고, ‘남의 생각’인 책을 토대로 ‘나의 생각’을 하게 되고, 다양한 사람과 교류하면서 관점을 넓히게 된다고.


(프로그램의 정체성을 얘기하며) 사실 무언가를 버리지 않고 뚜렷한 정체성을 쌓을 수는 없다.


(‘동물이 대접받는 나라는 사람을 함부로 대하지 않습니다’라는 말을 비판하며) 그 구호는 우리가 추구해야 할 가치의 순서를 고의로 흐리며, 사실에도 부합하지 않는다. 세계 최초로 동물보호법을 만든 나라는 나치 독일이었고, 히틀러는 평생 개를 아낀 채식주의자였다. 이는 단순히 불쾌한 우연이 아니다. 공감이 윤리의 지침이 되기에 얼마나 부적절한가를 웅변하는 강력한 증거다.


말하고 듣는 사람들이 읽고 쓰는 사람들보다 현재를 더 많이 사는 것 같다. 읽고 쓰는 분류만이 수십 년, 수백 년 뒤를 진지하게 고민한다. 그만큼 ‘지금 이 순간’을 놓치게 된다. 현재에 집중하는 것이 행복의 비결이라고 하던데, 그렇다면 읽고 쓰는 이들은 우울해질 수밖에 없는 운명인 걸까? 대신에 우리는 외로움을 덜 탄다고 할 수 있을까?


매체 영향력의 상당 부분은 내용보다는 그것들이 공짜고 접근성이 좋다는 데서 나온다. 진입 장벽이 낮으니까 복권 당첨 같은 성공담이 ‘당신도 할 수 있다’는 식으로 슬쩍 왜곡된다. (중략) 나는 한국에서 이들 매체는 기본적으로 저예산 독립 미디어라고 생각한다. 자기가 만드는 콘텐츠를 사랑하는 개인이 돈에 대한 욕심보다 그저 그 일이 좋아서 꾸준히 시간을 바칠 때 제대로 굴러간다. 매체 소비자들 역시 콘텐츠의 품질에는 관대한 반면 운영자의 진심이나 태도 같은 문제에는 예민하다.


모차르트는 “내가 하는 일에 비해서는 많이 받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에 비해서는 너무 적게 받는다”고 했다는데,


고전은 독자에게 얌전하게 교훈을 던져주지 않는다. 그들은 독자들이 피할 수 없는 방식으로 시비를 건다. 자신을 감당할 수 있겠느냐고, 이 존재가 무슨 의미인지 알아맞혀보라고 묻는다.


(출판이 팬덤 비즈니스가 되는 상황을 우려하며) 나는 이것이 너무나 아이러니하게 느껴진다. 내가 생각하는 독서는 무조건적인 지지, 열광, 숭배의 정반대에 있는 행위인데. 내게 책이란 비판, 숙고, 성찰의 도구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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