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독후감

이승우, 『에리직톤의 초상』

by 김감감무

뱀은 하와를 유혹해 열매를 따먹게 한다. 그렇게 신과 인간과의 수직적 관계는 틀어지고 인간은 추방당한다. 신 없이 존재하게 된 인간들에게서 폭력이 탄생한다. 카인이 아벨을 죽인다. 형이 동생을 죽인다. 인간이 인간을 죽인다. 인간의 역사는 폭력과 함께 시작해서 쭉 이어진다.

폭력은 인간만을 향하지 않는다. 1부의 중심이 되는 사건은 아그자의 교황 암살 미수 사건이다. 1부는 뱀을 다룬 한 실험극에 대한 정 교수의 강연으로 시작한다. 이 뱀은 우리 모두에게 있다. 소설 속 인물들은 각자가 지닌 뱀을 어떻게 안고 가는지 자신의 삶을 통해 보여준다. 이들의 삶이란 결국 작가 내면에서 치열하게 맞붙듯 고뇌한 개혁과 형식, 수직과 수평, 포용과 긴장의 대립이다.

병욱이 돌아온 탕아마냥 목회자의 길을 다시 걷기로 결정하며 소설은 끝난다. "우리는 가이사에게만이 아니라 가이사와는 질적으로 다른 제대로 된 권위를 향해 우리 자신을 바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병욱의 동료의 입을 빌려 작가는 말한다. 수직 없이 수평적인 우리 인간들만 존재하는 세상의 잔인함과 공허를 지적하고 신과의 틀어진 관계를 회복해야 한다고 소설은 말한다.

1부는 그의 등단작이었던 중편이고 시간이 흐른 뒤 2부를 덧붙여 장편으로 나왔다. 80년대 초반의 이승우와 후반의 이승우가 함께 쓴 책이다. 그 둘이 그리 다른지는 모르겠다. 다만 좀 더 가까운 우리네 현실을 바라보게 된 것 같다는 말 정도는 할 수 있을 것 같다. 어렵고 복잡했지만 사랑하는 작가의 첫 작품을 다시 읽으며 보낸 행복한 크리스마스였다. 근데 아직도 좀 어렵긴 함... ㅋ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마야트레이 데비, 『나 한야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