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도 슈사쿠의 작품에는 시험에 빠진 인물이 자주 나온다. 『침묵』속 인물들은 배교와 생존이라는 딜레마를 맞이한다. 『바다와 독약』의 인물들은 살리기 위해 죽여야 하는 딜레마를 맞는다. 두 작품의 차이라면 『바다와 독약』의 인물들 중 몇몇은 딜레마를 딜레마로 느끼지 않는다는 것이다. '살리기 위해 죽인다'는 명분일 뿐이다. 그들은 명분의 뒤에 숨어서 죄의식 없는 살인을 유희하듯 저지른다. 고뇌 없이, 즐기며 저지르는, 딜레마 아닌 딜레마는 이 작품이 『침묵』보다 더 지독하고 차가운 작품으로 느껴지게 한다.
아직 읽지 못한 『국화와 칼』이라는 책에서는 일본인을 '죄'를 피하기보다는 '수치'를 피하는 걸 더 중요시하는 민족이라고 표현했다고 한다. 죄는 상관없지만 수치는 상관있는, 타인의 시선과 사회의 벌은 상관있지만 그것으로부터 안전이 보장된 상황에서 저지르는 죄는 상관없다는 심리다. 이러한 죄의식의 부재는 『침묵』의 기치지로가 천주교에 완전히 귀의하지 못한 원인이기도 하다. 배교와 생존의 갈림길에서 단 한 번의 예외 없이 기치지로는 생존을 선택한다. 저열한 모습, 엔도 슈사쿠의 작품에서는 자주 느껴지는 자기 민족에 대한 회의다.
인간은 어디까지 잔인해질 수 있을까. 엔도 슈사쿠가 초점을 맞추는 지점은 매번 다양한 질문과 깨달음을 준다. 그리고 매번 바다 앞에 홀로 서있는 듯한 기분이 들게 한다. 유머러스한 성격이셨다는데 참... 마음이 여린 분이셨을 것 같다는 잡소리로 글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