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들 이렇게 산다고 말해줘.
청소년기 반항에 반쯤은 실패한 학생이었던 나는 충실히 교육과정을 밟았다. 가출은 했지만 아침 7시엔 집에 들어와 등교를 준비하는 아이였다. 내 인생의 형태는 어찌하여 이런 건지, 나는 언제나 절반의 충실함과 절반의 반항심으로 생을 이끌어 왔다.
집에선 어려움을 겪었지만 학교는 싫어하지 않았던 덕도 있을 것이다. 선생님들과 사이가 좋은 편이었고, 몇몇 선생님들은 나를 많이 아껴주시며 집으로 초대하시거나, 방과 후에 따로 만나 시간을 보내거나 하기도 했었다.
어려움과 즐거움 사이에서 방황하며 대입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던 시기를 지나, 고등학교 3학년이 되자 갑자기 대학에 가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영원한 패배자가 될 것 같은 느낌이었고, 문턱 안의 세상과 밖의 세상이 큰 차이가 있을 것 같다는 막연한 두려움이 들었다. 문턱 밖에 남겨진다는 두려움이 나를 뒤덮었다. 그리고 가장 큰 문제는 대학에 가지 않으면 당장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거였다. (절반의 충실함?)
그런 상황에도 불구하고 관심이 없는 과목에는 영 집중이 되지 않았다. 좋아하는 공부만 하고 싶었기에 언어와 문학, 사회탐구, 특히 윤리와 근현대사만 미친 듯이 파고들었다. 거의 참고서를 새로 만드는 수준으로 깊게 파고들었는데, 근현대사를 공부할 때는 무슨 독립투사가 된 것처럼 분노 속에 밤을 새기도 했고, 윤리를 공부할 때는 철학자가 된 것처럼 유레카의 순간을 기다렸다. 그런 성정 때문에 어떤 과목은 교과서가 학기 말까지 하얀 백지였고, 어떤 과목은 모든 책이 깜지였다.
수학에서도 그런 기질이 발현된 것이 문제였다. 나는 어떤 수학공식이 왜 생겼는지 너무 궁금했고, 시험 기간에도 그 수학공식을 누가 만들었으며, 그 사람은 어떤 문제에 봉착했기에 ‘공식’이라는 엄청난 걸 개발까지 해버린 건지 역사를 추적해 본 뒤에야 문제풀이로 넘어갈 수 있었다.
원인이 없는 결과라는 건 도무지 있을 수 없는데, 시작이 없는 끝이라는 건 상상조차 할 수 없는데. 그 시작과 원인을 모른 채로 결과를 만들어 내라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절반의 반항심?)
내가 정말 머리가 좋아서 그 시작을 빠르게 이해하고, 혹은 그 시작과 필요를 스스로 진작부터 깨달을 수 있었다면 좋으련만 애석하게도 나는 그 정도의 그릇은 되지 못했다.
그래도 하나의 길이 막힌다고 해서 꼭 죽으라는 법은 없다고, 그 시절의 나는 글을 참 잘 썼다. 논술 대회에 나가면 상을 받았고, 매 글쓰기 수업마다 칭찬을 받았다. 글 쓰는 일은 딱히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단락의 분량을 정하는 일, 도입부를 자극적으로 시작할 비유를 가지고 오는 일 등은 큰 노력 없이도 수월하게 이루어졌다.
그렇게 글쓰기로 수능 전 이미 한 개의 대학에 입학을 확정 지었다. 덕분에 수능날도 쉬는 시간마다 쉬엄쉬엄 운동장을 산책했다. 수리영역 시간엔 제일 앞장의 4문제만 풀고 잠을 잤다. 그리고 이후 다른 대학에도 차석으로 합격했는데. 다행이라고 생각했지만, 묘했다. 돌이켜보면 이 시기가 적당히 맞추며 사는 습관을 갖게 된 계기일지도 모르겠다.
대학에 입학한 뒤로는 빠르게 친구들을 사귀었고, 총학생회에도 가입하여 학교 생활을 열심히 했다. 서울 전역에서 열리는 등록금 집회에 참여하였고, 내 마음이 진심인지 아니면 이식받은 것인지 생각하지 않은 채로 대자보니 플랑이니 하는 벽서 같은 것을 신나게 써내려 갔다. 내가 무언가 중요한 일을 하고 있다는 사명감에 빠지기도 했다. 그게 귀여운 동아리 수준이었다는 것을 지금의 나는 알지만 그때는 나 스스로를 엄청나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절반의 반항심과 절반의 충실함?)
공부를 하고, 학비를 벌고, 학생회를 하고, 동아리를 하고, CC는 또 못 참지. 내 20대 초반은 하루하루가 가득 차 있었다. 집에서는 우울증을 겪고 있던 엄마와 항상 심각하게 다투었다. 크게 잘못한 게 있을 리 만무했던, 무단결석도 단 한 번 해보지 않은 청소년기의 나는 엄마에게 있어 ‘김 씨 성을 가진, 존재부터 아주 못된 딸’이었으며, 쓰레기였고,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존재였다. 집에서 보내는 모든 시간은 내 존재의 긍정을 증명하기 위한 투쟁의 시간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어떤 지원을 받을 수 있을 리 만무했다.
삶은 지속되어야 했다(왜 삶이 지속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는지 모르겠지만). 학비를 벌고, 생활비를 벌고, 공부를 하고, 더 큰 벌이를 위해 취업 준비를 하고.
대학 때 하고 싶었던 일이 무엇이었나 생각해 보면, 그런 걸 생각할 겨를도 없었던 것 같다. 가끔은 돈이 없어 밥을 먹지 못하는 날들도 있을 정도로 당장 내일의 끼니를 어떻게 해결할지, 이번 달 휴대폰비를 어떻게 내야 할지 같은 당면한 문제들을 처리하는 것만 해도 온 정신이 쏙 빠졌었다.
그래서인지 4학년 때는 주변을 에워싼 ‘대기업 취업 준비’라는 분위기를 별 고민 없이 받아들였었다. 다른 걸 고민할 여유가 없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다만 4년을 공부한 전공은 꼭 살리겠다고 다짐했었다. 그래서 남들이 몇십, 몇 백 개씩 원서를 쓸 때 원서를 5개 정도만 낸다든지 하는 짓을 감행했었다.
그게 그 시절 내가 지킬 수 있는 최소한의 명분이나 자존심이었을지 모른다. 그리고 이 또한 절반의 충실함과 절반의 반항심이었다고 생각한다.
사주를 보면 항상 듣는 말이, 상대의 말을 들어줄 거면 확실하게 들어줘야지, 들어주는 척 절반만 맞춰주면 안 된다.이다. 이렇게 타고난 것일까? 절반의 충실함과 절반의 반항심으로.
이 모든 것이 내가 기준이 없기 때문인 것 같기도 하고, 용기가 없어서인 것 같기도 하다.
또 한 편으로는 다들 나처럼 살지 않을까. 다들 이렇게 산다고 말해줘. 하고 싶다.
확실하게 방황하지도 못했고, 확실하게 공부하지도 않았고, 확실하게 사회운동가도 아니었으나, 확실하게 시류를 받아들이지도 못했던 나는 항상 절반의 충실함과 절반의 반항심 안에서 괴롭다. 인생이 고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