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의 끝에도 지켜야 할 것

갑작스러운 작별, 남겨진 마음을 생각해본다

by 김현

책을 읽을 때 첫 페이지가 중요하지만,
가장 기억에 남는 건 마지막 장이다.
이야기가 끝나는 그 순간, 비로소 그 책이 전하려던 메시지가 선명해진다.
그리고 그 감정은, 긴 여운이 되어 마음속에 오래도록 머문다.

그런데 책만 그럴까?
사람도 마찬가지다.

누군가를 처음 만났을 때의 설렘과 첫인상은 분명 중요하다.
하지만 내 기억에 가장 깊이 남는 건,
그 사람의 '마지막 뒷모습'이다.

그래서일까.
이별에도 예의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


서연이를 처음 만난 건, 그 아이가 1학년이 되던 해였다.
책도 잘 읽고, 숙제도 빠짐없이 해오는 아이.
태권도 도복을 입고 씩씩하게 학원에 들어서던 모습이 아직도 선하다.

국가대표 태권도 선수가 되고 싶다던 서연이.
“코알라쌤!” 하고 부르며 내게 애정을 듬뿍 표현해주던 아이.
눈만 마주쳐도 피식 웃음이 났던 시간들.

그 뒤로 서연이의 꿈은 매해 바뀌었다.
태권도 선수에서 학교 선생님, 그리고 피아니스트까지.
그 변화들을 곁에서 지켜보는 건,

내게도 작은 기쁨이었다.

수많은 학생들 사이에서 서연이는 유독 내 마음을 끌었다. 4년이라는 시간을 함께하며, 서로의 눈빛만 봐도 통하는 사이가 되었다.


*


그러던 어느 날,

병원 창구에서 진료를 기다리고 있을 때,
서연이 어머니에게 문자가 왔다.

> “선생님, 잠시 통화 가능하신가요?”

학원 선생이라면 알 것이다.
이런 문자가 주는 불길한 예감을.
마음을 다잡고 전화를 걸었다.
두 번의 연결음 뒤, 어머니의 단호한 목소리가 들렸다.

> “서연이 수업, 이제 그만두려고요.”


예상하지 못한 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막상 들으니 마음이 툭, 무너져내렸다.

> “서연이에게 무슨 일이 있나요?”

> “그냥... 그만 다니고 싶대요.

오늘부터 못 갈 것 같아요.

6월 수업료 환불 부탁드립니다.”

수업 당일, 갑작스러운 통보였다.

오늘부터?
그냥 이렇게 끝이라고?

서연이와의 추억,

함께 웃던 순간들


그 4년이라는 시간이 전화 한 통으로 끝나는 순간이었다.


*


학원은 언제든 그만둘 수 있다.
학생의 선택이고, 그 결정엔 이유가 있을 수 있다.
처음엔 자존심이 상하고 마음도 아팠지만,

시간이 지나며 그런 선택을 이해하게 됐다.
학원이 루즈해졌거나, 관심사가 바뀌었을 수도 있다.
아이들의 마음은 늘 자라고, 흔들리기 마련이니까.

하지만 떠남에도 예의는 있다.
몇 년을 함께한 시간이라면,

짧은 인사 한마디쯤은 나눌 수 있지 않을까.


그 마지막이 어떤 태도로 마무리되느냐에 따라,

남는 기억은 전혀 달라진다.


*



“오늘이 수업 당일인데, 이렇게 갑작스럽게 말씀하시니 당황스럽습니다. 학원 규정상 2주 전 미리 알려주셔야 하는데요.”

변명이 이어졌다.
방과 후 일정이 어떻고, 공부 부담이 크며...
하지만 내 귀엔 아무것도 들어오지 않았다.


나는 그저 환불 절차를 설명하며 기계적인 목소리로 대응했다.

하지만 정말 하고 싶은 말은 따로 있었다.

“어머니, 4년입니다. 4년을 함께한 시간을 이렇게 전화 한 통으로 끝낼 만큼 저와의 시간은 의미 없었나요?”


그 말은 끝내 입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남은 건, 씁쓸히 깨문 입술뿐이었다.


*


책을 덮듯, 관계에도 끝이 찾아온다.
하지만 그 마지막 장면이 어떤 모습이냐에 따라,
기억은 전혀 다른 온도를 남긴다.

서연이와의 이별은 내게 ‘작별의 태도’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했다.


이별은 단순한 종료가 아니다.
함께했던 시간에 대한 예의이고, 존중이며, 고마움이다.

짧은 인사 한마디, 눈을 맞추는 따뜻한 순간 하나.
그것만으로도 이별은 추억이 된다.
그리고 그 추억은,
잊히지 않는 마음의 자리로 오래도록 남는다.

나는 오늘도 아이들을 만난다.
그리고 언젠가 찾아올 이별을 준비한다.

이번에는,
조금 더 따뜻하고 예쁘게 마무리할 수 있기를 바라며.





#이별에대하여
#관계의기록
#마음을건네는글
#감정에머무르기
#브런치에세이

일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