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아가씨' 원작 소설 '핑거스미스' 비교분석
내 인생을 망치러 온 나의 구원자
최근 영화계의 동향을 살펴보면 원작소설을 바탕으로 한 영화의 비중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우리가 아는 유명한 작품들 중에서도 소설을 원작으로 한 작품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소설과 영화는 비슷한 장르이면서도 완전히 일치될 수 없는 분야이기에 예술을 공부하는 사람이라면 한번쯤 이야기 해보아야 할 주제이다. 소설이 영화화되는데 있어 작가와 감독은 같은 이야기를 다루지만 각자의 다른 시각으로 그 작품을 바라보며 표현한다. 본질은 같지만 겉을 달리하기도 하며 본질 자체를 건드리는 경우도 있다. 이렇게 창작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소설의 영화화 특징에 대해 이야기 해보고자 한다.
그래서 선택한 영화는 박찬욱 감독의 ‘아가씨’이다. ‘아가씨’는 세라워터스의 ‘핑거스미스’ 소설을 각색한 영화로 동성애를 주제로 한 영화이다. 2016년 개봉한 아가씨는 영상미와 반전스토리로 연일 화제가 되었다. 나는 단순히 ‘동성애’라는 주제 때문에 이 작품을 선택한 것은 아니다. 소설 핑거스미스가 영화 아가씨로 각색되면서 시대적 배경이 서양에서 동양으로 전환되었다는 큰 특징이 있었기 때문이다. 같은 이야기가 다른 시대적 배경을 갖고 있다는 점에 호기심이 생겼고 서양의 여성작가와 동양의 남성작가라는 차이점이 각 작품에 어떻게 드러날 것인가에 대한 궁금증에서 이 작품을 선택하게 되었다.
영화 ‘아가씨’와 원작소설 ‘핑거스미스’의 두드러지는 차이에는 2가지가 있다. 바로 ‘시대적 배경’과 ‘ 내용적 요소’이다. 우선 표면적으로 가장 크게 변화한 것은 바로 시대적 배경이라고 할 수 있다. 핑거스미스 같은 경우에는 18세기 말 영국을 배경으로 했다면 아가씨는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하였다. 시대적 배경이 서양에서 동양으로 전환된것이다.
영화 아가씨 속에 그려진 코우즈키 저택을 비롯해 주인공들의 의상과 소품들에 있어 ‘핑거스미스’ 배경 자체를 어떻게 동양화 시켜 표현하였는가도 중요하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가 중점적으로 보아야 할것은 ‘핑거스미스’라는 작품이 한국감독에 의해 영화화 되면서 왜 꼭 ‘일제강점기’라는 배경을 선택해야만 했는가 이다.
이 이유에 대해서는 아가씨의 박찬욱 감독이 인터뷰를 통해 명확하게 밝힌바가 있다. 핑거스미스에서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 기본 뼈대는 ‘아가씨와 하녀’라는 계급사회와 정신병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에 계급사회와 정신병원은 핑거스미스가 영화로 각색됨에 있어 절대 생략될 수 없는 부분이기도 했다. 때문에 박찬욱 감독은 필연적으로 일제강점기라는 시대적 배경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아가씨와 하녀라는 계급과 근대기관인 정신병원이 등장할 수 있는 시간은 일제강점기가 유일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시대적 배경의 변화도 있었지만 소설이 영화화 되면서 내용적인 면에서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초반에 흘러가는 내용의 구성은 원작소설과 아주 유사하지만 내용의 구성은 많이 변화되었다. 핑거스미스에서는 사건의 모든 시작이라고 할 수 있는 출생의 비밀이 영화에서는 완전히 배제되었다. 또한 소설 속 꽤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정신병원 이야기 또한 대폭적으로 삭제되었다. 그러다보니 모든 출생의 비밀을 알고 있는 석스비 부인의 인물 비중과 역할도 확연하게 변화 할 수 밖에 없었다.
가장 큰 변화는 바로 결말이라고 할 수 있다. 영화와 소설의 결말은 욕망으로만 가득찬 남성들이 파멸을 맞이하고 결국 하녀와 아가씨의 사랑이 이루어진다는 스토리는 같다. 하지만 그 과정에 있어 소설 속 아가씨 모드는 결국 다시 삼촌의 집으로 돌아가야했고 어릴적부터 자신을 옥죄고 가두었고 ‘외설적 책’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모습과, 여전히 그 책들 속에서 생계를 유지할 수 밖에 없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영화 아가씨에서는 어릴적부터 히데코를 억압했던 삼촌의 서재를 파괴하고 삼촌의 저택으로부터 완전한 탈출을 하게 된다. 여기서 우리는 박찬욱감독이 원작소설보다 더욱 중점을 두고 표현하고자 했던 이야기를 알게된다. 바로 ‘여성해방’이다.
세라워터스의 ‘핑거스미스’도 여성해방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지만 영화 아가씨와 비교했을때 그 강도가 약하다. 욕망에 가득 찬 남성을 대표하는 모드의 삼촌과 젠틀맨의 죽음으로여성해방을 이야기 하고는 있지만 소설 속 수와 모드가 자신의 사랑을 깨닫고 다시 만나게 되는 장소는 다시 삼촌의 서재이다. 이들의 사랑이 시작되는데 있어서의 장소가 여성을 억압했던 장소를 벗어나지 않았다는 점이 이를 증명한다고 할수있다. 또한 이 소설속 이야기 안에서 중점을 잡고 있는 출생의 비밀은 여성해방을 표현하기에는 오히려 방해요소가 된다.
그에 반해 박찬욱 감독의 ‘아가씨’는 ‘여성 해방’과 ‘여성의 주체성’에 많은 비중을 실었다. 영화 아가씨에서는 히데코와 숙희가 삼촌의 서재를 파괴한다. 또한 히데코가 어릴적부터 갇혀 있던 집의 ‘작은 담’을 뛰어 내리는 장면과 삼촌의 집을 벗어나 히데코와 숙희만의 세계로 떠나는 부분은 남성들로부터의 영원한 해방을 표현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장면은 여성을 비롯한 수많은 관객들에게 카타르시스를 안겨주었다. 박찬욱 감독의 예전 작품들을 분석해보면 대부분 여성을 수동적인 존재 보다는 능동적이고 주체적인 인물로 그려내었다. 어김없이 아가씨에서도 여성을 더욱 주체적인 인물로 표현했고 그런 박찬욱 감독의 영화적 특징이 발휘되었다고 할 수 있다.
같은 스토리를 담고 있는 작품들이라 할지라도 창작자가 누구냐에 따라 그 작품이 갖는 표현의 방법들은 분명한 차이를 갖는다. 창작자가 가지고 있는 작품세계와 중점을 두고 있는 가치가 모두 다르기 때문이다. 이런 창작가들의 개성와 차이들은 소설이 영화화 되는데 있어 긍정적인 면이 될 수도 있고 비판의 요소가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오히려 같은 스토리를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고 표현하는 다양한 창작물들은 관객들에게 더 많은 시야를 제공한다. 또한 때로는 원작으로는 보지 못했던 것들을 다시 볼 수 있게 하며 다듬어지지 않았던 원석을 영화라는 보석으로 만드는 길이 되기도 한다. 소설의 영화화라는 장르를 무조건 소설을 충실히 잘 각색하였는가에 대해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관객에게 어떤 새로운 다양성을 보여주었는가에 집중해보는건 어떨까? 우리가 그런 작품의 창의성을 허용할수 있다면 소설의 영화화가 우리 예술계의 문화다양성을 이끌어가는 주체가 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