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신발이 운명을 달리하셨어요.

관계도 인연이 다 했다면 떠나보내야 한다.

by 단비

"엄마 나 크면 이 구두 주세요"

왜 여자아이들은 엄마의 구두를 탐내는 걸까? 맞지도 않는 구두 위에 올라가 질질 끌고 다니면서 저 혼자 공주 놀이를 한다. 그 모습이 귀여워 죽겠다는 엄마의 표정이 한몫했을 것이 분명하다. 내 딸 나림이도 어렸을 때 예외 없이 내 구두에 욕심을 냈다. 발이 크면 얼마든지...


그날은 생각보다 금세 찾아왔다. 내 발이 유난히 작기도 했고 아이들은 부쩍부쩍 큰다. 딸이 초등학교 6학년 때였다. 얼추 발 사이즈가 비슷해지자 대놓고 내 신발을 신고 나가곤 했는데 그날엔 커다란 분홍색 리본이 달린 키 높이 슬리퍼를 기어코 신고 나갔다. 한 시간쯤 지났을까. 딸에게서 문자가 왔다.

"엄마 신발이 운명을 달리하셨어요"

함께 보낸 사진 속엔 리본은 이미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옆구리가 찢어진 슬리퍼가 대롱대롱 아이손에 매달려 있었다. 조금 어이없었지만, 그저 웃을 수밖에. 다치지 않았으니 됐고, 싸구려 슬리퍼라 다행이었다. 그 후로도 딸이 저승으로 보낸 신발은 여럿 있었고 그때마다 같은 문자를 보내왔다.

"엄마 신발이 운명을 달리하셨어요."


사실 "운명을 달리했다"는 말은 틀린 말이다.

"유명을 달리하셨다." 혹은 "운명하셨다"가 맞다.

하지만 어린 딸에게 설명한들 알아들을 리 만무했고 또 아이에게 말의 옳고 그름이 중요할 리 없다. 운명을 달리하건 유명을 달리했건 무슨 상관이겠는가. 굳이 억지로 끼워 맞추자면 신발 한 짝은 두 개이니 하나가 망가져서 두 개가 각각 서로의 운명이 달라졌다고 생각하면 꼭 틀린 말도 아니겠다 싶었다. 사족이다.

신발은 버려졌다. 찢어진 신발은 미련 없이 떠나보내는 것이 자연스럽고 당연하다.


인연도 서로의 운명이 달라지면 쉽게 보낼 수는 없을까?

분명 보낼 때임을 알면서도 누군가와의 관계를 정리하는 일은 도무지 신발을 버리는 것처럼 쉽지 않다. 마음속 한자리를 차지하고는 부서지고 망가져도 도무지 떨어지려 하지 않는다. 어쩌면 유통기한이 지난 지도 모르고 아깝다며 쟁여 둔 통조림처럼 미련스럽게 버리지 못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완벽한 한 쌍이 되지 못하는 신발은 이미 신을 수 없는 신발이다. 버리는 게 맞다. 관계도 마찬가지다. 나 혼자 붙들고 있다 한들 완벽한 한 쌍이 될 수 없다. 세상 속의 관계는 서로 다르기에 이해해야 하고 '네가 옳다. 네가 옳다'를 수없이 되뇌어야 그나마 유지된다. 얄궂지만 그마저도 몇몇 관계는 버티지 못하고 금세 깨지기 일쑤다. 때론 상처투성이 관계를 끌어안고 사는 상황들이 애처롭기까지 하다.


갑자기 단톡방에서 S가 말도 없이 나가버렸다. 단톡방의 누군가가 한 충고에 기분 나빴고 친구인 내가 자기편을 들지 않아 상처를 받았다고 했다.

세상에 '편'이라니......

내가 극히 혐오하는 단어 중 하나다. 세상에 내 편인 사람은 오직 나밖에 없다고 믿는 나는, 편을 운운하며 자신만을 바라보길 바라는 것이 못내 불편했다. S로부터 벌써 몇 번째 그 투정을 받아내고 있는 나 역시 기막히다.

달콤한 말만을 요구하는 관계가 건강할 리 없다. 무조건 내 편을 들어주는 사람도 없거니와 그렇다 한들 좋은 인간관계라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누군가의 편을 든다는 건 다른 누군가와는 적이 될 수도 있다는 말이다. 무조건 내 편인 사람은 세상에 나와 엄마가 전부일지도 모른다.

생각해보면 한편으론 기분 나쁘고 섭섭할 수도 있겠다 싶어 감정이 정리될 때까지 기다리려 했다. 불편해진 관계는 애써 꿰매려 들면 더 어긋나는 법이고 때론 시간에 맡겨 놓고 흘러가는 대로 두는 것이 상책일 때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정이란 때론 불편하고 참기 어려운 지경에 이른다.


그래서였을까. S는 우리와의 연락을 끊어버렸다. 소문에 의하면 새로운 친구들을 만난 듯했다. 어이없겠지만 솔직히 난 그 소식이 감사했다. 난 아마 질척거렸을 거다. 늘 그랬듯 엉켜버린 감정들을 풀어내느라 동분서주했을 것이 뻔했다. 다른 쪽으로는 점점 더 꼬여가는 것도 모른 채, 그저 마음이 더 편하다는 이유로 관계를 유지하려 발버둥 치며 자신을 괴롭혔을 것이다.


관계는 실타래 같아서 한쪽에서 아무리 풀려고 해도 좀처럼 풀리지 않는 경우가 종종 있다. 상대가 엉킨 실타래를 풀 의지가 없으면 결국엔 잘라낼 수 밖엔 없다.

만약 내가 한발 물러나 먼저 연락을 하고, 달래고, 편들어줬다면 우리 관계는 회복됐을까? 함께 공유했던 시간만큼 추억이 스멀스멀 기어 올라와 노력조차 하지 않았던 나를 원망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번엔 꼬여버린 실을 끊어내야 했다.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 상흔을 남기면서 임시방편으로 봉합해봤자 결국엔 곪아 터지고 회복이 안 될 것은 불 보듯 뻔하다. 어쩌면 서로가 인연이 아니라고 쿨하게 인정하면서 먼저 떠나버린 S의 용기가 천만 배 낫다.


나는 쉬이 인연에 상처받고 아문 후에도 오랫동안 거뭇해진 상흔을 안고 사는 편이다. 하지만 상처와의 동거를 짧게 끝내려면 어거지로 관계를 이어가는 반복되는 실수를 해선 안 됐다. 보내야 할 것은 미련 없이 보내는 것이 맞다.

이미 자신과 결이 맞는 새로운 인연을 만나 보란 듯 살아내는 S처럼 말이다. 나 편해지자고 붙들고 있다 한들 결국엔 서로를 몰아세우며 누군가는 상처받았다는 생각에 떠나버리고 남겨진 사람은 끊임없이 자신을 괴롭힐 것이기 때문이다.

서로의 인연이 다했다면 그것 역시 이미 버려야 할 망가진 신발에 불과할지도 모르겠다.


'운명을 달리하셨다'는 말이 잘못됐다는 것을 이해하고부터 딸은 신발을 망가뜨릴 때마다 이런 문자로 대신했다.

"엄마 신발이 사망하셨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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