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보면 당신을 마중 나온 우산이 보일 것이다.

혼자서 감당하기 힘들 때 힘들다고 말해보세요.

by 단비

비 오는 날이면 우산 없이 거리로 나갔다.

20대의 나는 유난히 혼자 하는 것들에 묘한 쾌감을 느꼈다.

혼자 영화를 보고 혼자 밥을 먹고 혼술도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그때의 나는 '함께'보단 '혼자'가 더 짜릿했다.

누구의 도움도 원치 않았고 누구에게도 지지 않으려는 홀로서기.

나와 결투라도 하는 것처럼 내 안의 나약한 존재와 싸우고 또 싸웠다.

세상은 나의 약점을 지뢰밭에 깔아놓고 걸리기만을 기다리기라도 하는 양 나에게 관대하지 않았다.

남들이 그들의 잣대로 하는 평가에 끊임없이 맞추며 더 나은 사람으로 보이려 그렇게 맞지도 않는 옷을 입고 있었던 것 역시 이제와 나의 가면이었음을 고백한다.


어쩌면 혼자 비 오는 거리를 우산 없이 다녔던 이유는

아무에게도 속내를 드러내지 못하는 내게 철저히 혼자라는 사실을 일깨워주기 위한

나만의 발악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걷다 혹시라도 아는 사람이라도 만나면 그 사람은 쓰고 있는 우산 한켠을 내어줬을까?

내가 요구하지 않아도 먼저 우산을 들고 마중 나와주는 이는 없었을까?

바보 같은 생각이다. 그때 내겐 도움을 청할 용기가 없었을 뿐이었다.


내가 만든 페르소나는 거짓이었다.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싶어 했던 거짓 가면은 혼자서도 당당하고 잘 해낼 수 있음을 끊임없이 증명하고

싶어 했다. 어떤 이름으로든 내게 주어진 역할을 완벽하게 소화하고 그것을 위해서라면 연기라도 불사했다.

맏딸이라는 이름은 가족을 위해 희생하고 책임을 지우게 했으며, 수없이 실패한 연애는

내가 그가 없어도 얼마나 잘 살아내는지 주변에 보여줘야 했다.

워킹맘으로 살아갈 때는 회사일과 가정일 모두를 완벽하게 해내는 슈퍼우먼으로 변신해서 연기했다.

그것이 진짜 내 모습으로 보이도록 혼신의 힘을 다 해서 나를 담금질했었다.


자신의 욕망을 위해 또 다른 페르소나를 만들어내는 과정을 그린 영화 '블랙스완'의 '니나'의 모습도 그러했다.

주어진 이름에 걸맞은 얼굴로 보이고 싶어 하는 그 욕망의 이름은 '완벽'이다.

발레리나인 그녀는 새로운 백조의 호수 작품에서 어렵게 주인공역을 따낸다.

하지만 화이트 스완과 블랙스완의 1인 2역을 하기에 '니나'의 페르소나는 나약하기만 하다.

'완벽'에 집착하는 '니나'의 욕망은 결국 스스로를 파멸에 이르게 한다. 자신의 페르소나를 이겨내지 못한 결과가 아니었을까. 맞지 않은 옷을 무리하게 소화시키려 했던 욕심이었을 뿐이다.


나 역시 졌다.

주변엔 세상 사람이라고 믿기지 않을 만큼 모든 것을 완벽하게 처리하는 사람들을 너무도 쉽게 만난다.

배 아플 만큼 그들을 닮고 싶었던 마음이었다면 조금은 용서가 될지 모르지만 그마저도 핑계일 뿐.

내가 당당함이라 포장했던 홀로서기라는 이름의 페르소나는 결국 나와 주변을 모두 속이는

소모적 행동에 지나지 않았다.

나는 절대 그 완벽한 사람들을 이겨먹을 수 없었다.


혼자였을 때 얼마나 외로웠는지,

혼자 먹는 밥이 얼마나 쌉쌀했는지,

혼자 비를 맞는 것이 얼마나 처량 했는지

실은 오래전부터 나 자신은 알고 있었으리라.

내가 완벽할 수 없는 인간임을 인정하고 나서야 비로소 편안해진 나를 만날 수 있었다.

세상 사람들은 나의 완벽함을 요구한 적도 없으며 자신과 직접적 연관이 없는 한

나의 자질구레한 일상에 관심조차 없었다.

이 깨달음을 얻기까지 수많은 사람들에게 잘 보이기 위해, 불필요한 감정 소모를 해왔고

때론 연기를 하는 수고로움도 피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내 삶 전체를 부인하고 싶지는 않다.

나는 꽤나 열심히 살았고 가끔은 그 가면 덕에 잘 버텨내기도 했었다.

누구나 아플 수 있고 지칠 수 있다는 것을 야속하게도 속절없이 흘려버린 시간 속에서

더디게 깨달았을 뿐이다.

내가 완벽함을 증명해 보이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만으로도 홀가분함을 느낄 때의 안도감은

얼마나 편하던지.


우산 없이 비 오는 거리를 헤맬 일은 더 이상 없다.

눈만 돌려도 주변엔 편의점이 널려있고 원하면 언제든지 우산도 비옷도 살 수 있다.

전화만 하면 우산을 들고 마중 나오는 사랑하는 이도 있다.

난 부족함을 인정함으로써 그동안 갑옷처럼 입고 있던 완벽이라는 이름의 답답한 옷을 벗고

가볍게 일상을 살아갈 수 있게 됐다.

어쩌면 손을 잡아 준 사람이 있기에 가능했고 손을 뻗어 내는 용기를 냈었기에 실현될 수 있었다.


아직도 가끔은 그 두터운 갑옷이 필요해 안절부절못하며 찾을 때가 있기도 하다.

하지만 어떠랴 오랫동안 처음부터 내 것인 양 입혀있던 그것을 쉽게 벗어버리는 것 역시

시작할 때만큼이나 어렵다는 것 역시 인정해야 한다.

우리는 누구나 자신이 원하는 욕망의 이름으로 갑옷을 입는다.

하지만 내가 겪는 아픔까지 숨기며 살아갈 이유는 없다.


돌이켜보면 비는 내가 느끼는 아픔과 슬픔의 상징과도 같았다.

온몸으로 받아내는 것만이 해답이 아니었음을 가까이엔 내게 건네줄 수많은 우산이 존재한다는 것을

폭풍우가 지나고 온몸이 흠뻑 젖고 나서야 깨달았다.

비가 오면 비를 맞지 말고 주변을 둘러보자.

어쩌면 당신을 마중 나온 우산이 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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