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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단비 Sep 13. 2021

생계형 강사가 죄는 아니잖아?

돈되는 거다 합니다.

"강사님은 전문분야가 어떻게 되세요?"

"저요? 돈 되는 거 다합니다."

웃자고 한 말인데 얼굴이 달아올랐다.

이미 뱉어낸 말이라 주워 담을 수도 없었다.

젠장 어쩌자고 그런 말을 농담이랍시고 한 것일까?


프리랜서로 전향했을 때 처음 일 년간은 수입이 거의 없었다.

원래 영업을 잘하는 스타일도 아닌 데다 초보강사에게 어느 기업에서 대뜸 강의를 줄까?

내가 할 수 있는 방법은 강사들과 업체를 연결해 주는 컨설팅회사와 계약하는 것뿐이었다.

수수료를 떼지만 초보강사에게 그만한 버팀목도 없다.

많은 강의를 맡기 위해 전문분야는 때에 따라 바꿔야 한다. 

굳이 전문분야 운운하지 않아도 초보는 그저 초보티가 나기 마련이다.

괜히 경력을 보는 게 아니다. 

프로필에 얹어 놓을 거래처가 절실한 그땐 닥치는 대로 강의를 했었다.


서비스강사는 강의분야가 광범위하다.

CS 관련 강의는 물론이거니와 커뮤니케이션, 리더십, 이미지 메이킹 등등 기업에서 하는 

모든 강의를 학원 시절 배운다.

한 가지 물건을 파는 전문점이 아닌 잡화상이랄까.

그렇게 여러 강의분야를 강사 양성과정을 통해 배우고 특강을 듣고 몇 년 흐르다 보면

자연스레 나만의 전문분야가 생기게 된다.

나와 함께 학원을 다녔던 강사도 처음엔 CS강사로 시작했지만 지금은 스피치 전문강사다.

처음부터 한 분야만 공부해서 그 강의만 하는 강사들도 적지 않다.

다만 대학의 전공분야로만 직업을 선택하지 않듯 강사들도 마찬가지다. 

어찌어찌하다 보니 그렇게 되는 경우가 더 많다.


초보강사 시절엔 어디선가 누군가가 불러주기라도 하면 강의료고 뭐고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달려간다.

그것이 어떤 주제의 강의건 맞춰서 공부하고 준비한다.

강사들은 망해도 강사를 대상으로 하는 강의는 늘 호황이다.

지식에 대한 목마름이라는 거창한 목적도 있겠지만 기업에서 원하는 

소위 잘 나가는 강사의 콘텐츠를 배우려는 강사들의 부단한 노력이 있기에 가능하다.


나는 그때나 지금이나 달라진 것 없는 생계형 강사다.

강사라는 직업을 17년이나 하고 있지만 달라진 건 강의 건수나 강의료일 뿐 다양한 기업 강의를 소화하고 있다.

나 역시 전문적으로 하고 있는 콘텐츠가 있긴 하다.

하지만 마카롱 고르듯 내가 원하는 스타일의 강의만 고집할 형편이 못 되는 건 여전하다.


무슨무슨 전문강사예요 라고 말하는 강사를 만나면 한편으론 부럽고 뭔가 있어 보이는(?) 그들의 당당한 

모습에 잡다한 이것저것을 하는 내가 방물장수가 된 기분이 들곤 한다.

없는 거 빼곤 다 있는.

'아 나도 내 전문분야만 하면 좋겠다.' 


그 옛날 초보강사 시절 진담 반 농담 반으로 했던 '돈 되는 거 다 하는 강사'라고 했던 그때보다 

많은 거래처와 그래도 괜찮은 강의료를 받고 있지만 딱히 전문분야 없는 강사로 살고 있다.

'전문 강사'라는 말이 유난히 신경 쓰이는 이유는 그저 '있어 보이는'강사이고 싶은

욕심일 수도 있다.


강사 구인 사이트에 들어가면 다양한 카테고리 안에 강사들을 나눠 넣었다

코너별로 배치된 강사들을 입맛에 맞게 고르면 된다.

저쪽 코너에 있던 강사가 다른 코너에서도 쉽게 발견된다.

그들의 전문분야는 나만큼이나 다양하다.

그저 넘쳐나는 강사 시장(피 튀기는 레드오션이다)에서 선택받기 위한 치열한 경쟁일 뿐 모두가 전문가다.

책을 낸 저자는 물론이거니와 연예인, 은퇴한 스포츠 선수할 거 없이 너도 나도 강사가 되는 세상이다.

설 곳이 줄어든 만큼 오히려 해야 할 분야는 점점 늘어나고 있다.


소위 '있어빌리티'한 전문강사들도 실은 기업에서 원하면 

자신의 전문분야와 상관없는 강의를 하기도 한다.

퍼즐 맞추듯 기업에서 제시한 주제를 어떻게든 강의에 끼워 맞춘다.

사실 전문분야가 뭐냐고 얼굴 맞대고 물어보는 사람도 강사들 밖에 없다.

기업의 교육 담당자들은 프로필을 보고 원하는 강사를 선택하기 때문에 이미 정해진 강사한테 전문분야를

물어보진 않는다. 오히려 다른 주제의 강의가 가능한지를 물어보는 경우가 더 많다.

그런 질문을 했다는 건 다른 강의로 나를 또 부르고 싶다는 손짓이기에 열과 성의를 다해 강의 가능한

다양한 주제들을 꺼내 보인다. 자랑스럽게. 있어 보이게.


나는 생계형 강사다.

다양한 분야를 17년간 공부했고 강의했고 지금도 새로운 강의를 위해 고군분투한다.

비록 있어 보이지 않을 진 모르지만

여전히 수년간 찾아주는 기업이 있고 무엇보다 이 일을 사랑한다.

생계를 이어가게 해 주고 일에 대한 만족감을 충족시켜주는 내겐 최고의 직업이다.

점점 좁아지는 시장에서 그나마 긴 시간 버티게 해 준건 다양한 콘텐츠를 개발하고

기업맞춤형으로 강의해왔기 때문일 것이라고 자족하며 살고 있다.


다행스럽게도 그간 해왔던 모든 강의는 내가 공부하고 싶은 욕심에서 시작한 것이었고

좋아하는 것들을 다 해보는 호사를 누렸다.

나를 빛나게 해 준 건 명함에 적힌 호칭이 아니라 강의장에서 청중들과 교감하며 행복해했던

순간들이었다.

성공의 기준이 금전과 감투가 아니듯 

이제 '있어 보이고' 싶어 하는 쓸데없는 욕심만 걷어내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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