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은 아끼고, 자존감은 올리고
작년 여름이었다. 에어컨 청소 업체를 부르는 것을 미루고 미루다가 이제는 도저히 에어컨 없이 버틸 수 없는 무더위가 시작되어 에어컨 청소 업체를 알아보았다.
그런데 늦어도 한참 늦었다. 에어컨 청소 업체의 최고 성수기에 업체를 찾다니! 게다가 내가 있는 곳은 남해였다. 근방에 있는 진주나 사천 같은 큰 도시에서 업체가 와야 하는데, 가뜩이나 기름값도 비싸던 작년 여름이었기에, 벽걸이 에어컨 하나 청소하러 남해까지 올 업체를 구하기는 매우 어려웠다. 전화를 돌리다가 포기해 버렸다. 3월에 업체를 부르려 해도 적어도 세 가정은 묶어서 업체를 모셔와야 하는데, 극 성수기에는 말해 뭐 하랴. 어렵게 구한다고 해도 대기기간이 길었다. 이러다가 서늘해지는 가을에 에어컨 틀겠다 싶었다.
나 혼자만 사는 것이면 그냥 선풍기와 냉수 샤워로 여름을 버티고 넘어갈 수도 있었다. 하지만 여자친구가 왔을 때가 문제였다. 찜통 같은 집에 초대할 수는 없었다. 한 번 와보고 그 길로 도망가버릴 수도 있지 않은가.
결국 어쩔 수 없이 내가 직접 하기로 했다. 뭐든지 알려주는 유튜브 선생님이 계시니까!
많은 에어컨 업체 사장님들이 영상으로 청소하는 법을 알려주셨다. 그중에서 필터만 빼서 청소하는 가짜 청소 영상 말고, 분해해서 안에 있는 송풍팬까지 청소하는 영상 몇 개를 보았다. 검은곰팡이가 잔뜩 쓸어있는 송풍팬이 바로 꿉꿉한 냄새의 원인, 건강을 해치는 나쁜 놈, 악의 근원이다.
처음에는 의구심이 들었다. 가르쳐 주시는 선생님은 ‘별 거 아니고 쉽다. 직접 하고 아낀 돈으로 소고기 사 먹어라!’고 하시면서 가르쳐 주시는데 ‘과연 내가 할 수 있을까?’하는 의구심이 무럭무럭 자랐다. 괜히 일 저질렀다가 애꿎은 에어컨만 고장 내는 건 아닌지?
자기 의심에 휩싸인 내게 용기를 북돋아주는 영상이 있었다. ‘주연‘이라는 유튜버인데, 보통 전자장비 리뷰에서 자주 뵈었던 분이다. 그런데 에어컨 청소 영상을 계속 보다 보니 알고리즘이 이 분이 에어컨 청소하는 영상을 추천을 해줬다. 나사 하나도 못 뺄 것 같은 여리여리한 여성이 노가다 목장갑을 끼고 전동 드릴로 에어컨을 드르륵드르륵 분해를 했다. 안에 있는 송풍팬까지 꺼내어 청소하는 모습을 보고 나도 용기를 얻었다! 나도 할 수 있다!
분해조립이 제일 어려워 보였다. 사실 분해만 한다면야 청소는 솔로 열심히 닦으면 되는 거니까. 게다가 내가 가지고 있는 연장으로 분해가 다 될지 안 될지 모른다. 우리 집에는 이케아 가구조립한다고 산 만 원짜리 이케아 전동드릴 세트 밖에 없었다.
그래도 일단 부딪혀 보았다. 영상을 보면서 찬찬히 따라 했다. 유튜브 선생님 에어컨과 내 에어컨이 완전히 같지는 않아서 사진을 찍으면서 작업을 진행했다. 혹시나 조립할 때 까먹으면 안 되니까.
조심조심하면서 나사를 하나씩 풀어갔다. 하나씩 진행될 때마다 ‘오, 내가 이런 것도 하다니’ 하는 뿌듯하고 신기한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이대로 쉽게 술술 진행되지는 않았다.
필터를 제거해 청소하는 것까지는 쉬웠는데 냉각기 안에 있는 송풍팬을 꺼내는 것이 일이었다. 좁은 틈에 있는 나사를 빼내려면 얇은 드라이버가 필요했는데, 나는 뚱뚱한 전동드릴밖에 없어서 송풍팬을 분해를 할 수 없었다. 그리고 에어컨이 벽이랑 붙어 있어서 드라이버로 분해를 한다고 해도 옆으로 뺄 수 있을지가 미지수였다.
그래서 그냥 에어컨 송풍팬을 꺼내지 않고 냉각팬 아래로 보이는 틈으로, 송풍팬 사이사이를 닦아내기로 마음먹었다. 구멍이 몇 개 일까. 어림잡아 100개는 넘지 않을까. 나무젓가락에 물티슈를 묶어서 구멍 하나하나씩을 닦아낼 때마다 백 년 묵어 보이는 시커먼 때가 나왔다. 몇 번을 닦아 내도 계속 나와서 한 구멍당 4~5번은 닦은 것 같다.
인고의 시간이 지나고 어깨가 뻐근해질 때쯤 드디어 내가 만족할 만큼 닦아냈다. 그리고 냉각기는 다이소에서 산 3000원짜리 에어컨 청소 분무기를 뿌리고 마른 수건으로 결대로 닦아내었다.
그리고 조립을 다시 진행했다. 우당탕탕하면서 조립을 해서 부서지진 않았나 걱정이 되었다. 전원을 다시 연결하고 시운전을 해보았다.
‘띠리링’
정상 작동을 하고, 에어컨 냄새는 쾌적했다! 그 순간 정말로 뿌듯함이 밀려왔다! 내가 이걸 해냈어!! 자존감도 올라가는 기분이 들었다. 이런 것도 혼자 할 수 있는 사람이니까. 자기 효능감이 팍팍 올라가서 너무 기분이 좋았다. 업체를 부르면 적어도 7만 원이었다. 돈도 굳었다!
신나서 인스타그램 스토리에도 올렸다. 스토리 공간에는 다들 맛집이나 핫플가서 ‘나 잘 나가요’ 하고 올리는 경우가 많다. 이 공간에 내가 이룬 작지만 뿌듯한 업적, 분해된 에어컨을 올린다. 이런 스토리를 올리는 사람은 내 지인 중에는 절대 없다. DM으로 웃기다는 반응이 줄 잇는다. 좋다! 오히려 이런 것이 진짜 힙한 것이다!
내친김에 회사에 있는 에어컨까지 청소를 해보자 싶었다. 팀장님께 청소업체를 불러달라고 말했다가는 결재부터 업체 선정까지 올 겨울은 되어야 청소를 할 수 있을 것이다. 청소 한 번 안 하고 몇 년째 돌아가고 있는지도 모르는 저놈의 에어컨은 늘 찝찝했다. 팔을 걷어붙이고 드릴로 분해를 시작했다. 드릴 소리가 들리자 다른 동료들이 무슨 일이 있나 하고 와보고 신기하게 쳐다보고 가신다.
한 번 해봤으니까 경력직 아닌가. 처음보다는 수월하게 진행되었다. 이번에는 집에서는 못 했던 송풍팬도 회사에 있는 드라이버를 빌려서 분해에 성공하였다. 세상 더러운 송풍팬을 통째로 꺼내 박박 솔로 씻는데 얼마나 시원하던지! 이 곰팡이 덩어리를 계속 틀고 있었다니 소름이 돋았다.
시원하게 벅벅 씻어내고 햇빛에 잘 말린 후 다시 조립하고 시운전을 했다.
‘띠리링’
또 성공이다. 시원하게 바람도 잘 나온다. 또 자기 효능감이 마구 올라간다. 그리고 이 에어컨은 나만 쓰는 것이 아니라 이 공간에 있는 모두가 쓰는 것이다. 다른 사람에게 도움이 되었다는 생각에 더 뿌듯했다.
자존감 키우는 데에 이만한 약이 없는 것 같다.
이렇게 나는 DIY(Do it yourself)의 매력에 빠져버렸다.
직접 하는 건 돈을 많이 아껴준다. 고금리 고물가 인플레이션과 맞서는 훌륭한 무기이다. 전 하버드 대학교 교수 조던 피터슨 교수는 유튜브는 구텐베르크 금속활자 혁명에 버금가는 그다음 혁명이라고 말했다. 그도 그럴 것이 유튜브 영상을 보고 요리도, 자동차 수리도, 에어컨 청소도, 의학 지식도 배우는 시대니까. 직접 해보니까 더욱 실감 났다. 이렇게 세상에는 인플레이션 펙터뿐만 아니라 디플레이션 펙터도 존재한다.
에어컨 청소에서 시작된 나의 DIY는 요리, 자동차 배터리 교체, 자전거 브레이크 교체 등 다방면에서 힘을 쓰고 있다. 자존감과 지갑사정이 고민이신 분들은 일상의 문제들을 한번 직접 해결해 보시는 것은 어떨까?
이 글을 읽고 있는 독자분들은 어떤 문제들을 직접 해결하고 계신지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