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세방 DIY의 즐거움
어느 날, 옷장 서랍이 뻑뻑하게 열리기 시작했다. 잘 안 열리긴 해도, 힘을 주면 열렸기에 그냥저냥 사용하고 있었다. 하지만 부드럽게 열리지 않고 힘을 줘야 열린다는 건, 어딘가가 부하를 받고 있다는 것. 점점 더 망가지고 있다는 것.
시간이 지나자, 뿌드득 거리는 소리는 더더욱 살벌해지고, 기름때가 잔뜩 묻은 구슬들과 얇은 고무들이 떨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서랍 슬라이드는 제 기능을 전혀 못하고, 그냥 힘으로 넣고 힘으로 빼는 수준까지 되어버렸다. 구슬들은 점점 더 많이 떨어져 나왔다. (이 구슬들의 정체는 나중에 알게 된다)
집주인이 내가 컴플레인 한 화장실 시트지 상태를 점검하러 방문했을 때였다. 사람을 부르면 돈이 많이 드니, 시트지는 그냥 내가 작업하기로 했다. 이거 말고 다른 거 불편한 거 없냐고 물어보셨다.
'서랍장도 집주인이 고쳐줘야 하는 범위에 들어가나? 아니면 내가 쓰다가 고장 난 거니까 내가 고쳐야 하나?' 하는 고민은 잠깐, 그냥 말이라도 해보자 싶어서 서랍장이 잘 안 열린다고 말씀드렸다. 집주인은 이건 고쳐주기 힘들겠다며, 서랍장이 안 열리는 게 아니면 그냥 쓰라고 했다.
"그럼 이것도 제가 그냥 고쳐도 될까요?"
"이런 것도 할 줄 알아요? 해주면 좋죠! 여기 집안에 있는 거 뭐든 고치고 싶으면 다 고쳐도 돼요!"
이것도 역시 해본 적은 없었지만, 그냥 서랍장 슬라이드를 새로 사서 갈아 끼우면 되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에, 내가 고친다고 말씀을 드렸다. 말씀은 드렸지만 귀찮아서 차일피일 미뤘다. 그러다가 월세방 DIY의 즐거움을 깨달았다. 뜯어진 화장실 시트지를 DIY 했는데, 너무 뿌듯하고 생각보다 삶의 질이 많이 올라가는 것이었다. 내가 고쳤다는 사실에 뿌듯하고, 자존감도 올라갔다. 매일매일 볼 때마다, 샤워하고 나올 때마다 기분이 좋았다. 이 서랍도 매일 쓰다시피 하는 물건인데, 그냥 마음먹고 고쳐버리자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요즘 가장 애정하는 쇼핑몰은 알리 익스프레스이다. 국내에서 쉽게 구할 수 없는 물건도, 알리에서는 저렴한 가격에 구할 수 있다. 쿠팡이나 네이버도 물론 좋지만, 알리는 별거 아닌 물건도 다 팔기 때문에 좋다. 이를테면, 가방 버클. 백패킹에 자주 사용하는 배낭의 힙벨트 버클이 부서진 일이 있었다. 이 부품은 사소하지만, 없으면 배낭 사용이 곤란한 부품이다. 힙벨트가 없으면 배낭 무게를 다 어깨로 버텨야 하기 때문이다. 버클을 국내에서 구매하면 배송비 때문에 비싸다. 부품 가격은 얼마 안 하는데, 배송비가 가격의 몇 배나 된다. 버클을 예로 들었지만, 다른 사소한 부품들은 국내 쇼핑몰에 팔지 않는 경우도 있다. 이럴 때 알리가 정말 유용하다. 배송이 오래 걸리긴 해도, 저렴한 가격에 물건을 구할 수 있다. 그 덕에 물건을 버리지 않고 고쳐서 오래 쓸 수 있으니 정말 고마운 알리이다. 국내에서 파는 제품도 거의 대부분 중국에서 수입한 물건을 마진을 붙여 재판매하는 제품이다. 또 예전과 다르게 중국산 물건의 품질은 몰라보게 좋아졌다.
서랍장 슬라이드를 알리와 네이버 쇼핑몰에서 검색해 보았다. 더 저렴한 가격에 국내 제품보다 더 튼튼한 양질의 제품을 알리에서 구할 수 있었다. 지금 서랍장의 슬라이드가 부서진 이유는, 서랍장 무게에 비해서 슬라이드가 너무 얇아 무게를 지탱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것을 고려해서, 폭이 넓고 무게를 훨씬 더 많이 지탱할 수 있는 튼튼한 제품을 골랐다.
무게는 45kg까지 버틸 수 있고, 폭도 기존 슬라이드보다 2배는 더 넓어 보였다. 6달러에 한 페어를 구매가능했다. 서랍장은 총 2개. 아래쪽 서랍장은 완전 슬라이드가 박살 났고, 위쪽 서랍장도 삐걱거리고 조금 있으면 다 부서질 것 같아서 고민하다가 그냥 2세트를 구매했다.
알리는 주문 해놓고 잊고 있으면 배송이 온다. 물건을 받고 나서 유튜브를 찾아보았다.
Andrew 아저씨의 친절한 설명을 듣고 자신감을 얻었다. 서랍에 미리 선을 그어 나사구멍 위치가 잘 맞도록 표시해 두는 것이 중요했다. 처음에 다 일체형으로 붙어있어서 암수 구분이 안되었는데, 영상을 보고 쉽게 분리할 수 있었다. 그리고 서랍장 슬라이드가 부서질 때 여기저기 나뒹굴던 구슬의 정체가 뭐였는지도 알 수 있었다. 서랍장을 부드럽게 움직이게 하기 위해 들어있던 내부 부품이었다.
먼저 내부에 수납되어 있던 물건들을 싹 비우고 청소를 했다. 평소에는 절대 청소할 수 없었던 수납장 뒷부분까지 물티슈로 깨끗이 닦아내었다. 포장도 뜯지 않은 새 양말 한 세트도 득템 했다. 아마 전에 살던 세입자의 물건이겠지. 청소는, 시작하기가 어려워서 그렇지 막상 하다 보면 제대로 하고 싶어진다. 그래서 청소를 위해 아직 완전히 고장 나지 않았던 위쪽 선반까지 빼내었다. 빼내면서 기존에 붙어있던 슬라이드는 완전히 다 박살이 나 버렸다. DIY를 실패하면 어떻게 하지.... 하는 걱정이 들었지만, 이미 박살 내버린 이상, 돌아갈 길은 없다. 비장한 각오로 꼭 성공시키리라 다짐했다.
기존에 붙어있던 슬라이드의 나사를 풀어 떼어냈다. 교체할 새 슬라이드에 맞는 나사 구멍의 위치를 연필로 잘 표시했다. 선을 그어 수평이 잘 맞는지도 확인했다. 기존 나사구멍 자리는 맞지 않아서, 새로 뚫어주어야 했다. 다만, 구멍을 뚫을 드릴이 없었다. 이거 하나 작업한다고 드릴을 사는 건 사치.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하자! 서랍장에 머리를 들이밀고, 나사를 해당위치에 놓고 구멍이 날 때까지 열심히 드라이버로 돌렸다. 5분 정도 열심히 돌리니 드릴 없이도 구멍이 파졌다.
암수를 맞춰 슬라이드를 설치하고, 무거운 서랍을 들어서 조심조심 밀어 넣었다.
긴장된 순간!
'드르르륵.... '
뭔가가 잘못된 것 같은 소리와 함께 서랍이 들어가지 않았다. 식은땀이 났다. 그냥 그대로 쓸 걸 괜히 내가 고친다고 해서 아예 다 부숴버린 건 아닌지 후회가 되었다. 정신을 바짝 차리고 최대한 손상이 없도록 평행한 방향으로 조심조심 서랍을 다시 빼내었다. 쉽게 들어가지지도 않고 빠지지도 않아서 무거운 서랍을 들고 진땀을 흘렸다. 약간 힘을 줘서 간신히 빼내는 데 성공했다. 그 와중에 슬라이드 구슬 부분의 철판이 약간 휘어져 버렸다. 진땀을 흘리며 구부러진 부분을 살살 때려 펴 주었다. 잘 들어가지 않을 때 힘을 써서 강제로 더 집어넣지 않아 천만다행이었다.
그러고 나서 문제가 뭔지 유심히 살폈다. 슬라이드는 총 3단으로 되어있다. 그중 1단은 분리되어 서랍장에 붙고, 나머지 2단은 옷장에 붙는다. 문제는 나머지 2단의 정렬이 바르지 못했다. 2단을 한 번에 합쳐서 나머지 1단의 서랍장 암수가 잘 맞게 넣어주는 것이 핵심이었다.
긴장되는 재도전.....
무거운 서랍을 들고 정렬을 맞춘 채로 넣는 것이 쉽지는 않았지만, 여러 번의 가늠 끝에 결국 성공했다!!!
그동안 항상 서랍을 열고 닫을 때마다 기분이 나빴다. 뻑뻑하고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하지만 지금 난 세상에서 가장 부드러운 서랍장을 가지고 있다. 열 때마다 너무 부드러워 감탄을 한다.
'이거 누가 고쳤지?'
서랍을 열 때마다 자아도취에 빠진다.
이 글을 읽는 분들도 혹시 고치고 싶은 것이 있다면 DIY를 도전해 보는 건 어떠신지? 필요한 부품은 다이소와 알리에 다 있고, 하는 방법도 다 유튜브에 나와있다. 실패의 리스크를 무릅쓰고 성공시켰을 때의 쾌감을 느껴보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