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저가로 즐기는 비수기 제주여행

내가 사랑하는 3월 비수기 제주

by 니이또

지금 잠시 지내고 있는 곳은 대구이다. 알고 지내는 경북 사람이 많은 탓에 대구 사투리는 낯설지 않지만, 이곳에 온 지 얼마 안 되어 이 도시는 낯설다. 공항이 근처에 있어 비행기 뜨는 소리가 자주 들린다. 문득 궁금해졌다. 대구공항은 어디를 취항하나?


당연히 제주도로 가는 비행기가 가장 많았다. 그리고 3월은 비수기다. 14,800원 하는 제주행 비행기 티켓값을 보고, 제주행을 결정했다.


그렇다. 어디로 갈까 고민하고 비행기 표를 사는 것이 아니라, 가장 저렴한 항공권이 있다면, 그곳에 나는 간다. 마치 물이 위에서 아래로, 가장 낮은 곳을 향해 물이 고이듯. '시간 빌 게이츠'는 저렴한 가격의 중력이 나를 이끄는 곳으로 간다.


최저가 항공권을 잡은 김에, 제주도를 최저가로 여행해 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기 위해 숙소에 돈은 쓰지 않고, 렌트카를 빌려 차박을 하기로 했다. 차박은 예전부터 해보고 싶었다. 내 차는 세단이고 뒷좌석 폴딩이 되지 않는 차량이라, 차박이 힘들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왕 렌트를 한다면, 전기차를 빌려 차박을 해보고 싶었다. 공회전 없이 공조장치를 마음껏 쓸 수 있는 경험이라! 다른 건 별로 부럽지 않은데 이것 하나만큼은 전기차가 진짜 부럽다. 차를 바꿀 순 없으니, 체험이라도 한 번 해보고 싶었다.


비수기라서 렌트카도 저렴했다. 보험 포함해서 일주일간 하루 2만 1천 원 정도로 아이오닉 5를 렌트할 수 있었다. 이보다 더 저렴한 하루에 만 원인 레이도 있었다. 하지만 3월 제주의 밤은 아직 춥고, 중간산 지역에서 차박을 한다면 거의 겨울 수준이다. 재작년 중간산 지역에 있는 교래 자연휴양림에서 벌벌 떨면서 캠핑한 적이 있어 잘 알고 있다. 더욱 극단적인 미니멀리스트가 되는 과정에서, 혹한기 캠핑을 포기하고 장비들도 다 처분한 터라, 빵빵한 구스 침낭도 이제 없다. 여름침낭과 라이너밖에 없어서, 잘 때 히터를 틀 수 있는 아이오닉 5를 선택했다.



제주 여행은 여러 번 경험이 있다. 대학교 친구들과 자전거를 타고 4박 5일 동안 해안길 한 바퀴. 50cc 귀여운 스쿠터를 빌려 한 바퀴. 내 첫 오토바이 헌터 커브를 삼천포에서 선적해 와서 50cc로는 갈 수 없었던 중간산 도로들, 임도들을 마음껏 쏘다녔던 여행. 뚜벅이로 올레길을 걸었던 여행 등.


하지만 렌트카를 빌려서 여행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어떤 컨셉으로 제주도를 여행하는지에 따라 경험하는 제주의 풍경은 달라진다. 여러 번 갔던 제주이지만 새로이 경험할 제주가 기대됐다.


이번 여행은 지금까지 했던 여행 중 가장 여유로운 여행을 하기로 했다. 그동안의 제주 여행은 목적지 여러 곳을 찍어두고 가볼 곳, 먹을 곳을 빼곡하게 네이버 지도에 즐겨찾기 해놓고 미션 클리어 하는 여행이었다면, 이번 여행은 그냥 여백을 두는 여행을 하기로 했다. 전기차에서 차박을 해보는 것. 그것이 목적이었으니까, 다른 건 굳이 하지 않아도 된다. 하루 종일 차에 누워서 빈둥거려도 된다. 그저 바다가 보이는 곳에 차를 주차하고 눈을 뜨고 제주의 아침을 맞으면 된다. 하지만 그렇게 하면 너무 심심할 수 있으니까, 제주에 온 김에 하루에 가볍게 산책할 수 있는 오름 하나를 오르거나, 올레길 한 코스를 걸으면 좋지 않을까 하고 막연한 계획을 세웠다.


첫날 저녁에 차를 인도받고, 날이 어두워져 그냥 가장 가까운 해수욕장인 이호테우로 향했다. 비가 오는 와중에 새로운 차에 적응하느라 애를 먹었다. 쏘카로 전기차를 운전해 본 적은 많다. 그런데 차박을 해본 적은 없었다. 시트 폴딩하는 법. 유틸리티 모드로 전환하는 법 등을 열심히 찾아봤다. 키가 커서 뒷좌석을 폴딩하고 누우니 생각보다 불편했다. 완전히 평탄화가 되지 않아 약간 경사가 진 부분도 불편했다. 그리고 창문 가릴 것이 없어서 불빛이 들어왔다. 드라마나 유튜브에서 보던 낭만적인 차박과는 달랐다. 그렇지만 뭔가 재미있었다. 제주도에 나만의 아지트가 생긴 느낌이었다. 유치원을 다닐 때 낮잠시간에 잠을 자고 싶지 않아서 어딘가에 숨어있었는데, 그때의 두근두근한 기분이 들었다. 예상대로 밤에는 추웠고, 히터를 틀고 자면서 쾌감을 느꼈다.


다음날 날이 맑아져서 차를 제대로 정리해 보았다. 전날에 비가 오고 정신이 없어서 전기차에는 프렁크가 있다는 사실을 잊었다. 이 차를 렌트하는 사람들도 거의 잘 모르는지, 먼지가 뿌옇게 쌓여 있었다. 프렁크도 활용해 나의 '제주집'을 다시 정리해 보았다. 이제부터 나의 집을 소개한다.



제주는 차박을 위한 인프라가 정말 좋다. 특히 비수기는 사람도 없어서 눈치 볼 일도 거의 없다. 공중 화장실과 무료 주차장. 이것 말고 더 바랄 것이 있을까? 심지어 표선이나 김녕에는 무료 캠핑장도 있다. 화장실과 바다, 무료 주차장이 있는 곳을 찾아서 이곳에 정박했다.


먼저 프렁크에 배낭을 넣어버렸다. 그러니까 차(혹은 일주일 간의 내 집)가 깔끔해졌다. 기본적으로 백패킹 가는 세팅으로, 9kg 40L, 기내 수화물로만 가능하게 짐을 싸왔다. 백패킹에 비하면 전기차 차박은 신선놀음이었다. 호텔이다. 텐트를 칠 필요도 없다! 걷을 필요도 없다! 비에 젖은 텐트를 말릴 필요도 없다! 심지어 히터가 나온다! 휴대폰 충전도 가능하다!

이번 여행의 컨셉은 최저가 차박 여행이다. 끼니마다 제주도 맛집 탐방은 하지 않는다. 평소에 먹던 대로 간소하게 먹는다. 그러기 위해서 소토 윈드마스터와 트란지아 반합을 조리기구로 챙겨 왔다. 하지만 일주일 안에 이소 가스를 다 쓸 수 없고, 남은 가스통을 들고 비행기를 탈 수 없으니 처리해야 하는데, 귀찮다는 생각이 들어 그냥 일주일간 비화식으로만 먹기로 했다. 아이오닉 5의 널찍한 글러브박스는 아래로 열리는 것이 아니라 수평으로 열렸다. 이곳은 내 식량 저장고가 되었다.

최소한의 조리를 위해 박카스 병에 소금도 챙겨 왔다. 나름 탄단지와 야채가 들어간 균형 잡힌 식단이다. 제주도 하나로마트를 들어가니 물가가 뭔가 잘못된 것 같이 높다고 느껴졌다. 그나마 제주 구좌에서 난 당근이 저렴해서 당근을 샀다.

이곳은 세면도구 보관함!

이곳이 침실이다. 버닝칸 비비색, 네이처 하이크 여름침낭, 씨투써밋 써모라이트 리엑터를 가져왔다. 네이처 하이크 에어매트와 데카트론 베개와 함께. 키가 180이 넘어서 자고 일어나면 대각선으로 누워있는 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이곳은 거실이다. 시원시원한 아이패드 화면으로 유튜브를 본다. 하는 일은 별 다를 것이 없지만, 달라진 게 있다면 제주 바다를 보며 햇살을 쬐며 본다는 것! 우중충한 집안에 있을 때랑 기분이 다르다.

이 가격에 아이오닉 5를 빌려서 다닐 수 있다는 게 감사했다. 이것이 비수기 제주의 매력이 아닐까? 많은 사람들이 제주도가 비싸다고, 차라리 일본여행을 가는 것이 싸고 재밌다고 한다. 하지만 날짜를 잘만 고르면 싸고, 즐길 것도 많다. 식당도 관광객이 아닌, 도민분들에게 사랑받는 곳을 고르면, 정말 혜자롭다.


이번엔 주로 한식 뷔페를 이용했다. 1코스를 걷다가 만 원짜리 한식 뷔페가 있길래 들어갔는데, 1인석도 있고 반찬이 정말 다양하게 구성되어 있어서 만족스러웠다. 계속 누룽지랑 그래놀라, 건빵, 두유만 먹다가 제대로 된 식사를 하니 정신없이 먹게 되었다. 이런 혜자 밥집의 특징은, 도민 분들이 많고 회전율이 높다. 이 기준으로 식당을 고르면 실패가 없다.


이번 여행은 보통 이렇게 보냈다. 차에서 잠을 자고 일어나서, 가까운 올레길을 걸었다. 물병 하나도 챙기지 않고 빈 손으로 걸었다. 올레길 종점에 주차를 하고, 버스로 출발 지점으로 이동을 해 걸었다. 이렇게 하니 올레길을 완주했을 때 내 차가 마중 나와있는 기분이었다. 도착하자마자 바로 누워서 낮잠을 자거나 쉴 수 있어서 좋았다. 이번에는 1코스, 2코스, 20코스를 걸었다. 제주의 올레길 총 27코스 중에서, 총 7코스를 완주하고 아직 20코스가 남아있다. 아직까지 남은 코스가 20개나 된다는 것에 감사함을 느낀다. 그리고 아직 오르지 못한 오름들도 무수히 많다. 한라산도 아직 미지의 영역이다. 이곳들은 제주를 몇 번이고 다시 찾을 이유가 된다.

산티아고 순례길 비석이 올레길 어딘가에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는데, 드디어 1코스를 걷다가 발견했다. 언젠가 '은의 길(Via de la Plata)'도 걷고 싶다. 그때는 하드 모드로 걷고 싶다. 알베르게도 전부 도네이션 알베르게만 묵고 싶다. 은의 길에 프랑스 길만큼 도네이션 알베르게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리고 체력이 허락하는 한 텐트에서 자고 싶다. 관광보다, '순례'에 가깝고 싶다.


좀 더 게으르고 싶은 날에는 올레길 대신, 가까이에 있는 오름을 찾아 걸었다. 유명한 오름을 찾아가는 것이 아니고, 그냥 가까이에 있는 적당히 오르고 싶은 높이의 오름을 찾아간다. 아무도 없는 따라비 오름 정상에서 확 트인 풍경을 감상했다.


밤에는 내 차가 머무는 곳이 집이 된다. 아무도 없는 곳에서, 하늘의 별과 달과 아이오닉 5.


새벽에 0도 가까이 내려갔지만, 따뜻하게 잘 수 있어서 감사했다.



제주도는 전기차를 타기에 최적의 환경이다. 가다 서다 하는 시내주행 환경이 많고, 오르막 내리막이 많기 때문에, 전기차로 주행했을 때 효율이 좋다. 중간산 지역에서 아래로 내려갈 때는 거의 배터리를 소모하지 않는 재미가 있다. 그리고 제주도는 친환경 에너지 비율이 높다. 여기저기 보이는 풍력 발전기의 전기가 여기 전기차로도 왔을 것이다. 그 에너지로 달리고, 또 중간산 지역에서 아래로 내려올 때 에너지를 버리면서 내려오는 것이 아니고, 충전을 해버린다. 그 생각을 하니 뭔가 기분이 좋았다.


비수기라서 어디를 가든 화장실이 있는 무료 주차장은 널널했고, 일부 주차장에서 차박을 금지하는 곳이 있었지만, 대부분의 곳은 금지 표지판이 없었다. 그리고 샤워를 할 수 있는 인프라도 빵빵하다. 자연휴양림이나 모구리 캠핑장의 예약은 비수기라 널널했다. 그리고 협재 홀라인이나 평대 홀라인과 같은 곳도 있다. 라운지를 하루 전에 예약하면 만 원에 샤워를 할 수 있는 서비스를 제공한다. 드링크도 제공해 준다. 추가금을 내고 세탁기를 이용할 수도 있다. 정말 여행 인프라가 빵빵하다.


제주도 여행은 렌트카 차박이 가성비가 제일 뛰어난 것 같다. 물론 더 초저가 여행을 할 수도 있다. 게스트 하우스에만 머물면서 뚜벅이 여행을 하거나 혹은 계속 백패킹을 하는 옵션도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제주도는 생각보다 크고, 버스 배차시간은 길기 때문에 뚜벅이로는 구석구석 돌아다니기가 힘들다. 그리고 비수기 특성상 날씨가 좋지 않기 때문에, 춥고 피곤할 때 한 몸 누일 곳이 없다는 것은 서럽다. 하지만 전기차 차박은 하루 이만 원으로 이 모든 것들을 누릴 수 있다.


하지만 일주일 동안 계속 차에서 자니까 피로가 누적되어 손 주위에 한포진이 올라왔다. 완벽히 평탄화를 하고 여유공간을 좀 더 확보한다면 정말 원룸 부럽지 않게 쾌적하게 자겠지만, 렌트카라서 어쩔 수가 없었다. 그래서 마지막 날은 숙소에서 자는 사치를 부렸다.


돌아가는 비행기는 김포행이었다. 사실 이번 제주 여행을 결정한 이유 중에, 서울에 볼 일이 있던 것도 이유 중에 하나였다. 그런데 그 간단한 볼일 때문에 대구에서 서울을 왔다 갔다 하는 것이 아까웠다. 하지만 제주를 여행겸 경유하니 ktx 편도 비용보다 저렴하게 대구에서 서울로 이동할 수 있었다.

최저가 항공의 특징은 아침 일찍 출발한다는 것이다. 렌트카는 아침 일찍 반납이 불가하다. 그래서 렌트카는 전날에 반납하고, 마지막 날은 비비색으로 야영을 하거나 찜질방에서 잔 다음 아침 첫 비행기로 돌아가려 했다. 하지만 너무 피곤해서 제주에서 늘 이용하는 가성비 좋은 호스텔에서 잤다. 더운물로 샤워를 하고, 빨래를 하고, 푹신한 침대에 누워 빨려 들어가듯 잠에 들었다. 일주일간 차박을 하고 이용하는 3만원짜리 숙소는, 정말 럭셔리한 경험이었다.


최저가 여행의 대미는 따릉이로 장식했다. 내가 서울에서 가장 좋아하는 것!


강남에 볼 일이 있어서 김포공항에서 강남까지 따릉이를 타고 이동했다. 시간도 많았고, 평일 아침 출근길에 커다란 백팩을 메고 9호선을 타고 강남까지 가는 것이 내키지가 않았기 때문이다. 천 원으로 일일권을 끊어서 ‘자전거 고속도로’인 한강 자전거길을 따라 강남까지 갔다. 일을 보고 나서 대구로 돌아가기 위해 고속터미널까지 갈 때도 아까 샀던 따릉이 이용권 하나로 일을 다 봤다.


처음으로 차박 여행을 해 보면서, 오랫동안 가지고 있던 차박에 대한 로망이 사라졌다. 원래 차박을 위해 스타렉스를 사거나, 전기차를 사고 싶다는 욕구가 있었다. 하지만 실제로 해보니까 로망과 현실은 거리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새로운 차를 사면서까지 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캠핑은 날이 풀리면 백패킹을 하는 것으로 만족하기로 했다.


하지만 이따금 차박이 하고 싶을 것 같다. 그럴 때 제주를 찾기로 했다. 감가를 먹을 대로 먹어서 렌트하는데 부담이 별로 없는 아이오닉 5로 차박을 하며, 아직 가보지 못한 제주의 구석구석을 즐기기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