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섭 May 21. 2021

나이는 존경의 수치가 아닌 조롱의 수치가 아닐까


 2019년 3월, 1년간의 휴학을 마치고 대학교에 복학했다. 어째서 학교의 개강 시기는 봄과 겹치는지 모르겠지만, 그날의 대학로도 지금까지 겪었던 봄의 대학로와 별반 다를 바 없었다. 상가에서는 버스커 버스커의 벚꽃엔딩이 흘러나오고, 수많은 새내기가 길거리를 점령하고 있었으니까. 흩날리는 벚꽃잎 사이에서 깍지를 낀 채 걸어가는 CC(Campus couple)까지 보고 있으면, 참으로 생기가 넘쳐 보인다. 최초로 성인의 자유를 부여받은 시기여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역시 새내기답다고나 할까?


 그러나 26번째 봄을 맞이했던 나는 무덤덤했을 뿐이다. “젊은 놈이 청승맞게 뭔 소리냐”라고 할 수 있겠지만, 4년제 대학교에서는 화석이라 불리는 나이였으니 더 할 말이 있으랴? 심지어 세상만물을 개화시키는 봄의 태양도 내게 “뭘봐?”라고 까탈스럽게 구는 느낌이었다. 자연스럽게 배우자의 접근을 피하는 50대 중년 부부처럼 말이다.




 뭐, 이런 잡설은 치우고 그날의 나는 동기 A와 함께 미세먼지를 가르며 등교하는 중이었다. 10분 정도 걸었을까? 곧 우리 학과 건물이 보이기 시작했다. 갈색 벽돌로 벽면을 가득 채운 4층짜리 건물. 적당히 낡아 보이고 적당히 역사가 있어 보인다.


 1년 만에 재회한 학과 건물이지만, 별 감흥이 느껴지지는 않는다. 수년째 반복된 패턴이 몸에 뱄나 보다. 나는 앞마당처럼 펼쳐진 주차장을 지나, 건물 입구로 향했다. 주차장과 건물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계단을 올라갈 때쯤, 담배연기 한 자락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물론, 학과 건물 아래에는 흡연 구역이 있었기에, 거기서 담배를 태우는 일은 그다지 특별한 일은 아니다. 강의 시작 전과 끝난 후에는 많은 이들이 몰려서 연기를 뿜어대는 곳이니까. 그런데도 담배연기에 눈길을 한 번 더 준 이유는 왠지 그 실루엣이 익숙했기 때문이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낯설지만 익숙했다. 이 모순된 느낌은 뭘까? 이에 대한 해답은 담배를 태우고 있는 이의 얼굴이 보일 정도로 가까워지니 알 수 있었다.



 “어? 행님! 오랜만이네요, 잘 지내셨습니까?”


 그는 2014년 내가 1학년일 때, 학생회를 했던 선배 C였기 때문이다. 그다지 교류도 없었고 친한 사이는 아니었지만, 서로 모르는 사이는 아니기에 아는 체를 했다. 그는 졸업논문 제출 문제 때문에 학교에 들렀단다. 외국에 워킹홀리데이를 갔다 오고, 여차저차 지내다 보니 아직 졸업을 못했다고 한다. 지금은 대학로 어디 술집에서 알바를 하고 있다고 한다.


 “그럼, 수업이 있어서 그만 가보겠습니다.”


 그와의 짧은 재회를 마치고 학과 건물에 들어갔다. 강의 시간까지는 약간의 여유가 있었기에 학생회실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기로 했다. 동기와 함께 의자에 앉았고, 책상을 사이에 두고 마주 보게 된 우리는 자연스럽게 눈이 마주쳤다.




 피식


 동기는 이상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순수하지 않은 미소다. 왠지 음흉하기까지 한 눈빛이었다. 몇 년을 룸메이트로 지내왔기 때문일까? 이상하게도 나는 그 미소의 뜻을 알 것만 같았다.


 내 육감이 알려준 그 미소의 의미는 ‘조롱’이다. 아직까지 졸업을 못한 선배에 대한 조롱이다. ‘아직도 알바나 하고 있냐, 그 나이를 먹도록 무엇을 했느냐.’라는 말이 그의 눈빛에 담겨져 있었다.


 “형도 똑같다.”


 그런데 그가 입을 열어서 한마디를 했다. 나도 똑같단다. 갑자기 이게 무슨 말인가? 잠시 멍해졌지만, 나는 곧 그 의미 또한 눈치를 챌 수 있었다. 바로 내 입에도 그와 똑같은 미소가 걸려있었기 때문이다.


 그래, 나도 무의식적으로 그 선배를 조롱하고 있었다. 남을 깎아내리며 우월감을 느끼는 저급한 심리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조롱의 미소를 피우고 있었다.



 그리고 동기의 말에 반박하지 못했다. 나도 똑같다는 말, 많은 내용이 생략된 말이지만 맞는 말이니까.


 당시 나는 26살로 대학교 동기보다 나이가 많았다. 누군가에겐 어린 나이겠지만, 4년제 대학교에서는 많은 축에 속한다. 정상적으로 대학교에 입학했다면, 졸업할 나이니까 말이다. 나는 정확히 재수 1년, 군대 2년, 휴학 1년 이렇게 총 4년의 세월을 학교가 아닌 다른 곳에서 보냈다. 그러다 보니, 동기들보다 나이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학년은 낮았다.


 그 탓일까? 2019년도에 3학년으로 복학했을 때, 지나가는 후배로부터 평소에 느껴보지 못한 시선을 받기 시작했다. 내가 선배 A에게 지었던 그 미소. ‘그 나이 먹도록 뭘 했냐?’라고 말하고 있는 눈빛 말이다.


 그런 주제에 나도 누군가를 조롱하고 있었다. 심지어 더 웃긴 것은, 2년이 지난 지금 나와 동기는 둘 다 8학기 정상 졸업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 이유가 어찌 되었든, 현재 우리는 선배 C와 같은 처지이다.


 참으로 어리석은 행태였다고 생각하나, 우리 사회에서 이런 경우가 드물지 않다는 생각은 나 혼자만의 착각일까?


 공무원 시험에 떨어진 복학생을 무시하던 후배가, 몇 년 후에 그 선배와 똑같은 처지가 된 경우를 심심치 않게 발견할 수 있는 현실을 보고 있노라면, 착각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우리의 이런 행태는 남을 깎아내려 자존감을 채우려는 저급한 심리였는지, 몸만 커버린 어른이가 되어버린 탓인지, 맞아야 정신을 차리는 놈이기 때문인지는 모르겠다.



 그러면, 이런 시선에서 자유로워지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당연한 말이겠지만, 내가 발견한 것은 단 한 가지였다.


 ‘끊임없이 자신의 가치를 입증해야 한다.’


 그 나이를 먹도록 무엇을 했는가에 대해 당당하게 대답할 거리가 있다면, 조롱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을 발견했다. 선배 C가 단순히 알바를 하는 것이 아니라, 나중에 가게를 차릴 목적으로 장사를 배우고 있다는 소문을 들었을 때, 그에 대한 사람들의 시선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더 이상 C를 조롱의 눈빛으로 바라보는 사람은 없다. 뚜렷한 목표가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존중한다. 조롱의 시선을 받던 나 또한, 동년 5월에 그동안 썼던 글을 모아서 한 권의 책을 자가 출판한 이후로는 불쾌한 시선을 받지 않았다.


 그래, 남을 쉽게 재단하는 게 우리나라 선비 문화의 일부이지 않은가? 결과만을 보고 타인을 분석하는 건 새삼스럽지도 않다. 부모조차 취업 못하는 자식놈을 부끄러워할 수밖에 없는 구조니까. 그러니, 내가 미래를 향해서 사람처럼 살고 있음을 결과로 보여준다면, 그 누구도 조롱하지 못한다.




 단지, 한 가지 의문점이 생겼을 뿐이다. 원래 사회가 이러했는지, 아니면 세상이 이렇게 변하고 있기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언제부턴가 나이가 곧 권위였던 시대. 즉, 나이만으로 존중해주는 문화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학창 시절 때 그렇게 외우던 오륜의 장유유서 자체가 사라진 것처럼 말이다.


 물론, 올바르지 못한 어른도 많기에, ‘연장자’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존경해야 한다는 의견에 대해서는 반대한다. 존중과 존경은 다른 문제니까.


 다만, 그 나이를 먹도록 무엇을 했는가에 대해 대답할 거리가 없다면, 존중하지 않음을 넘어서 ‘조롱’으로까지 발달할 수 있음을 상기하고 싶다.


 이제, ‘나이는 존경의 수치가 아닌 조롱의 수치가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생길 정도니까.

작가의 이전글 그럼 뭐 할 건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