웅웅웅
머리맡에서 온몸을 떨어대는 스마트폰. 요란한 소리에 잠에서 깬 나는 액정 위에 떠 있는 알림을 쳐다봤다.
“수혁아! 수혁아!”
전쟁이라도 났을까? 친구가 카톡으로 나를 애타게 찾고 있었다.
“뭐고.”
혼자 쭝얼거리며 스마트폰의 소리 모드를 무음으로 바꿨다. 그리고 이불을 머리 위에까지 둘러썼다. 지금 나는 숙취에 죽기 직전이거든.
드르렁
이후, 내 방에는 코고는 소리가 진동했겠지? 물론 나는 느끼지 못했을 거다. 눈을 감자마자 기억이 사라졌으니까. 그 누군가는 이런 내 모습을 보고 이렇게 말했을 수 있다. “친구가 급해 보이는데, 지금 숙취가 중요하냐? 이 인정머리 없는 새키야!”
뭐, 맞는 말이긴 하다. 나는 친구의 급한 연락을 다 씹은 채 코나 골고 있는 놈이니까. 그런데 뭐라고 해야 할지... 일부러 인정머리 없게 했다고나 할까? 그냥 귀찮았다고나 할까? 변명이라도 해보자면, 약 10년 만에 온 첫 연락이 돈 빌려달라는 말이었다. 대체 이걸 어떻게 빌려주냐. 당연히 처음 몇 번은 반 거짓말을 섞어서 좋게 거절했다.
“어, 미안타. 내가 지금 대학생이라서 여유가 없다.”
“어, 미안타. 내가 일 그만두고 서울에 올라온 지 얼마 안 돼서 지금 빈털터리다.”
“어, 미안타. 이제 취업한 햇병아리라서 나도 쪼들린다.”
그런데 내 마지막 변명에 ‘취업’이라는 단어가 들어갔기 때문일까? 그 이후부터는, 약 1년 주기로 오던 연락이 한 달 주기로 바뀌었다.
‘시발. 누굴 호구새키로 보노. 돈 나올 구멍이라도 찾았다는 기가?’
욕이 튀어나올 것 같지만, 다행히 하지 않았다. 이제는 사회화가 완료된 지성인이거든. 적당히 좋은 말로 둘러댈 정도의 사회성이 장착되어 있다. 하지만 내 원래 본성은 눈치를 1도 안 보는 극 ENTP. 한 마디로 공능제 중의 공능제였다는 말이다. 그리고 지금은 가뜩이나 숙취로 고통받고 있다. 그런 나한테 데체 뭘 기대할 수 있겠는가. 나는 성인군자가 아닌데…. (아, 오해하지 마라. 친한 친구들의 도움은 거절하지 않는다.)
하여튼, 그런 상황에서 나는 계속 잤다. 그리고 다음 날 다시 살아났다. 기상하자마자 스마트폰을 확인했다. 꽤 많은 카톡이 쌓여있었다.
‘귀찮노.’
그래. 곤히 자고 일어났지만 귀찮아서 안읽10을 했다. 이런 내가 진짜 인정머리 없다고? 영화 불한당의 설경구가 그랬잖은가. “사람이 아닌, 상황을 믿어라.” 상황이 딱 그렇게 말하고 있는데 무슨 말을 더 하랴. 아닌 건 아닌 거다. 어쭙잖게 착한 ‘척’하고 살고 싶지는 않다. 그런 모습은 나와 맞지 않다.
물론, 친구의 연락을 받고 나서 ‘진짜 급한 게 아닐까? 사정이 정말 힘든 게 아닐까?“라는 생각을 잠깐 했었다. 하지만 거금도 아니고 소액의 금전 때문에 10년 만에 친하지도 않은 친구에게 연락이 왔다는 건…. 내가 모르는 스토리가 많다는 뜻이겠지?
그 스토리가 비트코인일지 토토일지 아니면 다른 건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함은 최근 고향 친구와의 모임에서 알게 되었다.
“가는 요즘 뭐하고 사노?”
오랜만에 고향 친구들끼리 모이면 무슨 말을 하겠는가. 당연히 옛날 얘기나 하고 다른 친구들 근황 토크나 하는 거지. 적당히 술이 들어가고 취기가 올라올 때쯤. 누군가가 그 친구에 대해서 물었다.
"..."
그런데 뭐지? 갑자기 느껴지는 3초간의 정적이라고나 할까? 고개를 돌려 그 친구와 친했던 친구 세명을 살펴보니 서로 아이컨택 하는 게 느껴졌다. 잠깐의 정적이 끝나고 대화는 자연스럽게 다른 주제로 넘어갔다.
“나 화장실 좀.”
“나도.”
인당 소주 1병 반쯤 먹었을 때였을까? 친구 몇 명이 화장실을 가기 위해 자리를 떴다. 분위기가 자연스럽게 휴식타임으로 변했다.
“근데 가는 왜. 뭔 일 있나?”
나는 물 한잔을 마시면서 옆자리 친구에게 말을 걸었다.
“왜? 니한테도 연락 오드나?”
뭐지? 나 빼고 다 알고 있었다는 건가? 이 친구는 많은 뜻을 내포하고 있는 한 마디를 던졌다. 나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거렸다.
“그래. 그 이유야.”
말없이 고개만 끄덕거렸건만, 이 친구는 내가 어떤 연락을 받았는지 눈치챘나보다. 내가 생각한 것이 맞다고 시인했으니까. 우리 둘은. 그것에 대해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굳이 더 설명을 들을 필요는 없었다.
“한잔하자.”
역시, 착하게 사는 건 굉장히 힘든 일이다. 까딱하다가는 호구로 전락할 수 있거든. 그래서 내가 이 모양이다. 때로는 인정머리 없어 보이는 행동을 보인다. 착함과 호구 사이에서 외줄 타기를 하기가 귀찮으니까. 그 외줄에서 내려와 버렸다.
물론 우리 부모님은 남을 도우면서 살라고 가르치셨다. 착한 사람이 되라고 하셨다. 근데 왜 이렇게 컸는지 나도 모르겠다. 그저 좋은 건 좋은 게 아니라고 생각할 뿐이다. 확실한 게 좋은 거라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그래서 의문이 든다. ‘나중에 나도 자식이 생기면 착하게 살라고 말할 수 있을까?’에 대해서….
“남 등쳐먹지만 말고 너가 원하는 삶을 살아라.”
현재 떠오르는 대답은 딱 이 정도다. 그런데 이게 충분한 걸까? 대한민국의 미래를 책임져야 하는 아이에게 해줄 말이 이 정도면 될까? 좀 더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어 달라고 부탁해야 하지 않을까? 더 인정이 넘치는 삶을 살라고 말하면 욕심일까?
모르겠다. 지금 내 인생도 모르겠는데 그것까지 어떻게 알겠는가. 정답을 아는 누가 있으면 좀 알려줘라. 진짜 궁금하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