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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늘도 달리진 Sep 05. 2024

금수산트레일레이스를 즐기는 최고의 방법

열린 마음으로 묵묵히 달리기


*마라톤을 위해 달리기

‘마라톤을 위해 달리기’시리즈는 ‘1년에 최소 2번, 최대 N번 마라톤에 나가기’ 리추얼을 하며 경험한 마라톤을 리뷰해 보는 시리즈예요.




| 맵디 맵고 매운 금수산


'3, 2, 1! 시작! 파이팅!' 22K 코스에 출전하는 선수들이 달리기를 시작했다. 나도 그 중 한 사람으로 힘차게 달렸다. 출발지였던 청풍리조트 잔디구장에서 벗어나 교리교차로를 지났다. 산으로 진입하는 구간은 좁아서 병목현상이 일어났다. 모두가 일렬로 서서 엉금엉금 올라갔다. 한 방향을 향해 걸어가고 있는 그 순간 모두가 일행처럼 느껴졌다. 또 한편으로는, 이 구간이 지나면 본격적인 트레일레이스가 시작될 텐데 내가 A와 함께 잘 달릴 수 있을지 긴가민가했다. 여름 동안 A는 꾸준히 실외 달리기를 했지만, 나는 실내에서 *F45만 하고 실외 달리기는 거의 안 했기 때문이다. '맵다고 소문이 난 금수산 오르막은 얼마나 심할까? 혹여나 나에게 무슨 일이 생기는 건 아닐까?' 더운 날씨로 인해 대회 시작 전부터 땀이 났는데 생각도 많아져서 정신이 혼미했다.
(*F45: Functional 45minutes의 약자. 고강도 인터벌 트레이닝)


얼마 지나지 않아 넓은 구간이 나와서 모두가 병목현상에서 해방되었다. 본격적인 레이스가 시작되었고 나는 A와 함께 달렸다. 대회는 오르막을 달리는 선수, 빠르게 걷는 선수, 천천히 걷는 선수로 나누어졌다. 그러면서 선수 간에 간격 차이가 났다. 나는 천천히 걷는 선수였다. 그럼에도 등산스틱을 의지하고 슬로프를 끌어당겨 험난한 길을 넘어섰다. 2km 지점에 있는 외솔봉에 도착했을 때는 시간이 꽤 흘러 있었다. 그 무렵 A는 폴짝 오르며 몇 걸음 앞서가고 있었다. 중간중간 잘 따라오지 못하는 나를 보며 '무슨 일 있어요?'라며 걱정했다. A에게 나는 '머리가 아프고 몸이 힘들어서요. A 먼저 가셔도 괜찮아요'라고 답했다. 이런 말을 한 이유는 나를 위해서, A를 위해서였다.


A는 오르막길에서도 폴짝폴짝 잘 달렸지만, 나는 숨이 차서 도저히 달릴 수 없었다. A처럼 달리지 못하는 나의 몸이 안타까울 뿐이었다. 그러나 A는 함께 가는 사람을 놓고 가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며 함께하자고 했다. 그 이유는 인생에서 대회는 무수히 많지만, 함께하는 사람과의 시간은 영원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 순간, A가 나를 위해 멈춰 설 때마다 '저 못 달릴 거 같아요. 먼저 가세요'라고 이야기했던 스스로가 한없이 작아 보였고 창피했다. A는 내가 혼미한 정신에서 깨어날 수 있도록 전해질 음료를 나눠줬다. 나는 A의 챙김을 감사히 여기며 오르막길을 함께 나아갔다.


금수산트레일레이스 오르막길


| 지금 이 순간, 트레일레이스를 즐기는 최고의 방법


지친 몸을 이끌고 우여곡절 끝에 3.5km 지점 작은동산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더위와 힘듦에 굴복한 상태였다. 22K를 목표시간대에 완주하겠다는 플랜 A는 이미 훨훨 날아갔었고, 제한 시간인 6시간에 도착할 수 있을지도 확신할 수 없었다. 이처럼 답이 없는 상황에서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을 만났다. 풍경을 즐길 생각조차 하지 못한 우리와 달리, 그분들은 웃으면서 청주호를 배경으로 하여 사진을 찍고 있었다. 누가 먼저 말을 걸었는지 기억이 잘 안 나지만, 우리는 그들과 이야기하며 지금 이 순간 금수산트레일레이스를 즐기는 최고의 전략을 전수받았다. 그 전략은 22K코스를 완주하는 것을 포기하고 마음 편하게 풍경을 즐기며 11K 코스로 가는 것이었다. 지금 힘들더라도 *CP1까지 가지 않는 이상, 대회장으로 돌아갈 방법이 없기에 어떻게든 CP1까지는 가야 했다.

(*CP: Check Point의 약자. 간단한 음식과 음료가 제공되어 영양분을 섭취하는 곳)


그렇게 그들과 동지가 되어 따로 또 같이 달렸다. 조금만 더 가면 쉴 수 있다는 마음 하나로 CP1을 향해 걷고 달렸다. 우리는 우여곡절 끝에 모두 7KM 지점에 있는 CP1에 도착했다. 약과, 바나나, 물, 콜라, 빠삐코, 에너지젤을 먹으며 영양 보충을 하며 마음껏 쉬었다. 특히 폭염이었던 날 힘들게 운동한 후, 빠삐코를 먹으며 쉬니까 행복했다. CP1에서 쉬면서 이미 도착한 사람들, 이제 곧 도착하는 사람들을 구경했다. 그들을 보며 든 생각은 '나만 힘든 게 아니라 다 힘들구나'였다. 이 생각을 하니까 한결 마음이 편해졌다. 오르막길에서 나의 힘듦만 생각하여 한없이 푹 쳐졌는데 남들도 다 힘들다고 생각하니까 용기가 생겼다. 이제 CP1에서 도착 지점까지 어떻게 갈 것인지 정해야 했다. 선택지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조금 더 기다렸다가 차를 타고 도착지인 대회장까지 가는 것, 다른 하나는 11K 반환 코스로 가는 것이었다. 돌아가는 길은 둘레길이어서 덜 힘들 거라고 했다. 오르막길을 힘들게 올라온 것이 생각나서 잠깐 고민했지만, 우리는 대회를 즐기러 온 것이기 때문에 11K 반환 코스로 가는 것을 선택했다. 그렇게 우리는 다시 달렸다.


'파이팅! 조금만 더 가면 빠삐코 있어요!' CP1을 향해 달리는 사람을 마주치면 A와 함께 빠삐코를 언급하며 응원했다. 그렇게 응원하면 사람들의 눈빛이 빛났다. 그 모습을 보면 나도 덩달아 힘이 났다. 도착지를 향해 갈 때는 11K 코스를 신청한 A의 일행도 함께했다. A의 일행이 앞장서서 페이서 역할을 해준 덕분에 내려가는 길은 순탄하게 내려갔다. 내리막길을 달릴 때는 발에 리듬감이 느껴져서 산과 하나가 된 느낌이 들어서 즐거웠다. 잠깐 돌에 잘못 착지해서 넘어질 뻔한 순간은 있었지만, 평소에 운동으로 만든 코어 힘 덕분에 넘어지지 않았다. 내가 평소에 운동하는 이유 중 하나는 이처럼 사소하지만 사소하지 않은 순간에 나를 살리기 위함이지 않을까 확신하게 되었다. 그렇게 여러 내리막길을 달려 드디어 대회장에 이르렀다. 골인 직전까지 햇빛이 쏟아졌지만, 묵묵히 걷고 달리며 완주했다. CP1에서 휴식한 시간까지 합쳐서 4시간 11분 걸려서 11K를 완주했다. 찬란하고 꿈만 같은 금수산트레일레이스였다.    


금수산트레일레이스 완주


| 힘든 만큼 진하게 새겨진, 8월의 금수산


지난 8월에 다녀온 금수산트레일레이스를 떠올리면 아직도 가슴이 벅차다. 무차별적인 햇빛으로 정신이 혼미했던 순간, 끝없이 펼쳐지는 충주 청주호를 보며 감탄했던 순간, 끝없이 나오는 오르막으로 한계를 느꼈던 순간, 고생끝에 CP1에서 빠삐코 아이스크림을 먹은 순간이 아직도 생생하다. 금수산트레일레이스 대회장에서 풍긴 진한 땀 냄새도 기억난다. 이렇듯 힘들었던 만큼 금수산에서의 기억은 진한 추억이 되었다.


A와 나는 2년 전에 탑걸즈 러닝크루에서 처음 만났다. 그 후, 서울시 러닝크루인 7979에서 또 만났다. 달리기 행사에 자주 참여하며 많은 곳을 달려서 달리기 자체에 큰 재미를 느끼게 됐다. 열정이 넘친 나머지 2022 JTBC 마라톤 풀코스를 함께 도전했었다. 당시 풀코스 마라톤이 처음이라 불안해서 서로 이런저런 달리기 정보를 공유했었다. 우려와 달리 첫 풀코스는 모두 어찌저찌 잘 완주하였고, 찬란한 10월을 만들었었다.      


2년 전과 비교하여, 지금의 나는 성장했다. 2022년에는 트레일러닝을 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는데 이제는 무턱대고 트레일러닝을 신청할 수 있다. 장거리 대회에 대한 불안함을 여전히 간직하고 있더라도 어떻게든 완주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갖고 있다. 현재 잘 달릴 수 없는 상태라면 잠시 쉬어 갈 용기와 다른 방향으로 달릴 열린 마음을 갖고 있다. 오롯이 나를 받아들일 때 대회를 즐길 수 있음을 알고 있다. 그러니 일상에서도 지금의 나를 껴안는다면, 한 걸음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지 않을까?


금수산트레일레이스 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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