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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정표 Feb 16. 2023

나의 하루는 퇴근과 동시에 시작된다

퇴근을 한다. 드디어 하루가 시작된다.


하! 물에 잠겨 먹먹했던 목소리는 점차 생기를 찾아 높은 어조로 탁 트인 숨을 내뱉었다. 건조한 공기 탓인지 내내 뻑뻑했던 눈은 한가득 몰려오는 피곤함을 구태여 밀어내고 말간 낯짝으로 저물어가는 아침을 맞이한다.


나에겐 아침이란 자고로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는 철옹성 같은 성벽에 둘러싸인 공간이다. 적은 시간이나마 철저히 고립되어 그 무엇에게도 작은 감정 한 톨 전이되지 않는, 나만이 생각하고 느낄 수 있는 시공간.

그렇게 따지자면 회사는 사방이 뚫려 언제 어디서 적이 쳐들어올지 모르는, 요새 하나 없는 허허벌판이었다. 미세한 소리에도 긴장을 놓치지 않아야 하지만 찰나의 정적에 속는 순간 시끄러운 고함과 우렁찬 함성에 잡아먹힌다. 말 그대로 고요한 전장 속 진흙탕이랄까.






낮밤이 바뀌는 기이한 느낌에 휩싸이기 시작한 건 언제부터였지. 아, 아마도 일을 시작한 지 7개월쯤 지났을 무렵이었나. 아무리 눈이 빠져라 모니터를 보고 야근을 해도 몸이 부서져라 투자한 노력의 값은 평가 절하돼 쓰디쓴 고배를 마셨더랬다.


당연했다. 비록 하는 척이었대도 보여주기 식에 미쳐 하루종일 일하는 것을 당연하다고 여기는 사람들이다. 윗 직책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시간을 쥐어 짜내서라도 연장 근무하는 이들인데 한낱 샛병아리인 신입의 노력이 눈에 찰리가.

선배들의 모습을 통해 본인의 미래를 예견할 수 있다고들 하던데, 끔찍한 말이었다. 절대로 그들처럼 살고 싶지 않다. 일에 열정적이면 좋지 않느냐고 반문할 수도 있다. 본인의 업무에만 열정적이면 뭐하는가? 자신이 생각하고 행하는 모든 것들을 기준으로 세워 '이견 없는 정답'이라는 잣대를 팀원들에게도 들이미니 따르는 입장에서는 곤욕스러울 뿐이다. 남의 노력을 후려치는 것도, 다른 팀장들과 팀원들을 욕하고 떠든 후 등 돌리면 곧바로 서로의 욕을 하는 정치질도 싫었다.


학창 시절 일진처럼 행동하는 꼬락서니들을 무시하고 싶어도 하루종일 얼굴 맞대고 일하다 보니 쉽지 않았다. 이 세상에서의 낮은 나에겐 전쟁터였다. 그 얼굴들을 마주하며 끌어 오르는 분노와 늘 싸워야 했으니까 말이다. 그래서인지 어느 순간부터 아침이 더 이상 아침이 아니게 되었다. 그때부터였다. 일하는 낮 동안의 시간을 죽이기로 결심한 것은. 

  





나름 모범생 소리를 들으며 고분고분하게 살아왔다. 그렇게 강하지도 약하지도 않은 정신을 가진 나는 보통의 사람이었다. 아니, 오히려 밝고 활발한 아이라고 소개하는 편이 더 어울릴 것 같다. 속은 어떨지 몰라도 겉으로는 누구보다 잘 적응해 남들을 웃게 해 주는 아이였으니까. 그러나 그 말이 무색하게도 최근의 나는 반 송장처럼 정신을 놔두고 다닌다. 다들 왜 이렇게 힘이 없냐고 한 마디씩 건넨다. 그럼 속으로 무미건조하게 대답한다. "왜겠어요?" 


깜깜한 밤, 무엇도 듣지 않고 보지 않았더니 인지 능력 없는 AI 로봇처럼 보이나 보다. 그렇게 보인다면 성공이다. 잠자는 것처럼 조용히 숙면하다 곧 떠오를 나의 아침을 위해 이곳을 버텨내리라.




불규칙하게 흔들리는 지하철을 간신히 벗어나 자주 방문하는 카페에 갔다. 늘 앉던 구석 자리에 엉덩이를 붙이고 좋아하는 캐모마일을 마신다. 갓 우려져 뜨거운 차를 잠시 두 손으로 감싸 쥐면 손으로 전해져 오는 따뜻한 온기에 긴장이 스르르 풀린다. 본격적으로 시간을 즐기기 전 항상 거치는 사소한 루틴이다.

주변을 돌아보니 저마다의 모습으로 평온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 듯하다. 내가 자주 들르는 이 카페에는 노트북을 켜고 수업을 열심히 듣거나 책을 읽는 사람들이 유난히 많았는데, 그들을 보고 있노라면 회사가 아니라 이곳이 내가 속해있어야 하는 세상인 것 같았다.


공평하게 주어진 시간이건만 누군가는 시간 속에 틈을 내어 또 다른 시간을 발견하고 쟁취한다. 1시간을 2시간처럼 효율적으로 사는 것이다. 주도권을 뺏기지 않고 주체적으로 이곳까지 걸음을 내디딘 그들의 의지에 멈춰있던 심장이 뜀박질하듯 거세게 뛰었다.


좋아하는 책을 읽으니 휘몰아치던 감정은 그 기세가 한 풀 꺾였고, 나의 세계는 타인의 이야기를 통해 단정히 정비되었다. 궁금했던 사진 공부도 하며 배움에 대한 갈망도 충족할 수 있었다. 완전한 나만의 시간에 분에 넘치는 만족감을 얻는다. 이 여유로운 시간에 한껏 취해있을 때면 시간 가는 줄도 모른다. 그러다 마감 시간이 다와가면 느지막이 일어나 웃음을 입꼬리에 가볍게 건 채로 문을 열어 유유히 빠져나온다.


반질반질한 감처럼 익어가던 노을은 어느새 자취를 감추었고, 그 자리를 대신해 등장한 달은 엉킨 실처럼 여기저기 엉겨 붙은 구름에 가려 희미하게 빛났다. 오후 6시 30분부터 11시 30분까지 약 5시간에 걸친 나의 짧은 하루는 금새 저물었고, 정신적으로 깜깜한 회사에서의 밤이 아닌 과학적으로 그리고 물리적으로 정의된 진짜 밤이 찾아왔다.


가로등 불빛을 벗삼아 가벼운 발걸음으로 돌아가는 길, 머리 끝까지 충만한 기분에 흥얼거림이 저절로 나온다. 내일은 무엇을 할지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점심 메뉴를 고르듯 심혈을 기울여 고민한다.






언젠가 보았던 아주 붉은 노을

오전 9시 30분, 특별한 이유 없이 패잔병이 되어버린 나는 사람에 휩쓸려 쓰러질 것만 같은 지하철에서 숨을 죽이다 적들의 본거지에 침입한다. 지긋지긋하게도 찾아오는 의식 없는 밤이다. 전쟁같이 치열하게 치러지는 회사생활은 억만년 같은 시간이 지나야지만 종료된다. 그러나 그 긴 시간을 무사히 보낼 나는 착한 짓을 하고 칭찬을 바라는 아이처럼 달콤한 보상을 기대하며 인내한다.


유난히도 길었던 근무시간이 끝나고 회사 정문을 빠져나오는 길. 여느 때보다도 주황빛이 밝게 익어가는 중이었다. 늘 서두르듯 사라져 아쉬웠는데 오늘은 마치 날 기다렸다는 듯 더욱 천천히 저물었다. 주변의 고층 건물 외벽이 그 짧은 역사를 담아 투명한 유리벽에 반사시켰다. 절정에 도달한 붉은 빛에 휩싸인 도시는 모든 정신을 빼앗아 갈 만큼 황홀했다.


위로하듯 따뜻한 빛으로 주변 공기를 달구던 해가 머지않아 본격적으로 사라질 준비를 했고, 나의 하루를 응원하기 위해 이른 밤하늘을 불러, 집으로 돌아가는 이 기꺼운 길을 함께 마중해 주었다. 그 인사를 마지막으로 서둘러 정신을 차린 나는 설레는 마음으로 발걸음을 돌린다. 그리곤 힘차게 걸어간다. 또 다른 하루를 향해, 새로운 세계로, 나의 미래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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