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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소운 Dec 07. 2020

손톱 발톱으로부터의 해방

당당히 독립을 선언 하노라!

  나는 감히 우리 집 식구들의 손톱과 발톱으로부터의 해방과 자유를 꿈꾸었다.

“어라? 네가 손톱 깎았어? 엄청 보기 싫었는데, 잘했네”

“아니, 선생님이 깎아 주셨는데... 손톱깎기까지 사 오셨대”

“뭐라고?”

소파에 길게 누워 책을 읽다가 놀라서 벌떡 일어났다. 책과 핸드폰이 후드득 거실 바닥으로 떨어졌다.

  “네... 네... 네가 뭐라고 했길래 선생님이 손톱을 다 깎아줘?” 말까지 더듬으며 아들에게 물었다.

“어제, 나보고 손톱이 너무 길다고 하시길래 엄마가 안 깎아준다고 했지. 그랬더니 오늘 손톱깎기 사 오셨다며 잘라주시던데...”

“야~~~ㅁ 마~~~, 그러면 엄마가 뭐가 되니? 핑계를 댈 거면 네가 안 깎았다고 해야지. 내가 손톱 깎으라고 했어, 안 했어?”

“이제부터 안 깎아준다며? 손톱 깎는 거 무섭다니까”

“그래도 그렇지, 네가 엄마가 없냐, 아빠가 없냐? 선생님이 보다 못해 깎아줬다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중학생이나 돼서 자기 손발톱 못 깎는 애들은 너네들 밖에 없을 거다. 그게 뭐가 무섭다고, 귀신이라도 붙었니?”

"그렇잖아도 이제까지 엄마가 손발톱 깎아줬다니까 선생님도 놀라긴 하시더라고. 하하하... 이제 엄마, 학교 가면  창피하긴 하시겠네요"


  이건 간과할 수 없는 문제다. 다 내 잘못이다.

다른 집 엄마가 이랬다면 끌끌 혀부터 찼을 것이다.

'스스로 자기 일을 하도록 부모가 시켰어야지, 한 두 살 먹은 어린애들도 아닌데 언제까지 끼고 앉아서 손발톱까지 깎아주고 앉았대' 분명 이랬을 거였다. 다른 사람 잘못은 금방 알아채면서 내 잘못은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엄마들은 자식이 깔끔하고 단정하게 다녀야 한다고 생각한다. ‘신언서판’의 실천에서 기인하기도 하지만 ‘엄마의 체면’의 문제가 앞서기도 한다. 그래서 아이가 먼저 할 기회를 주지 않고 엄마가 미리미리 해줘 버리는 것이다. 그게 속 편하니까.


출처: 그라폴리오

  ‘라떼는...’ 얘기는 내가 들어도 식상하지만,

라떼는 말이다, 아침마다 머리 묶이며 움직인다고 뒤통수 쥐어박히기 싫어서 국민학교 4학년 때부터 머리 묶기 독립선언을 했다. 물론 손발톱 깎기도 1 + 1이었다. ‘발 좀 깨끗이 씻으라’는 타박을 듣고 싶지 않아서이다.

자고로 독립은 빠르면 빠를수록 너도 좋고 나도 좋은 것이다. 어떤 독립이든 막론하고.

  ‘이번에는 단단히 얘기해야겠다. 그냥 넘어갈 수 없다. 좌시하지 않겠어’


처음에는 뭐든 하기 힘들고 두려운 것이다. 손톱 발톱 깎다가 잘못돼 봐야 피 밖에 더 나겠느냐. 죽을 일이 아니다. 살점이 좀 떨어져 나가더라도 며칠만 지나면 낫는다. 삐뚤빼뚤하더라도 일단 네가 깎아보아라. 내가 다시 봐서 정리는 해줄게. 한두 번만 하다 보면 잘할 수 있다. 언제까지 엄마가 해줄 수 없지 않니. 중학생이 아직까지 엄마가 손발톱 깎아준다고 하면 '마마보이'라 놀림받는다. 그러니 제발 지금부터라도 네가 할 일은 네가 해라. 내가 손발톱 깎아주는 사람이냐.

  나의 1차 일장 연설의 요지는 이러하였다.

  

  한차례 잔소리를 늘어놓고 나니 제법 심상스러워져 마음을 내려놓고 있었는데 다 늦은 저녁에 남편이 기름을 드럼째로 갖다 부었다.

"여보, 나 발톱 좀 깎아줘. 발톱의 반은 잘라내야겠어. 벌써 이렇게 길었네. 어쩐지 아프더라니..."

 2차 대전의 서막이 울려 퍼졌다.


  “손이 없어 발이 없어, 아직도 발톱을 나한테 깎아달래? 그러니 애들도 손톱 깎아달라, 발톱 깎아달라 하지, 이제 다들 손톱 발톱은 자기가 알아서 깎아!~"

"왜 그래? 오늘 안 좋은 일 있수? 누구야, 엄마 화나게 한 사람이?"

아이들은 이미 한차례 연설을 들은 터라 '이제 아빠 차례구나'하는 기대에 찬 표정으로 빙글빙글 웃고 있었다.


  싸움 구경은 언제나 재미 보장이고 야단맞는 사람을 보면 마음이 뻥 뚫리는 쾌감을 얻게 되는 건 인지상정이다. 욕은 하는 사람보다 듣는 사람이 창피하고 치욕스러워야 제대로다.


 나이 한 두 개 먹은 것도 아니고, 내가 시다바리(보조원)도 아니고 언제까지 발톱을 잘라달래? 다이어트도 해서 배도 쑥 들어갔겠다, 이제는 발톱도 잘도 보이겠구먼, 언제까지 부른 배 타령이야! 그렇다고 누구 하나 내 발톱 깎아준 사람 있어? 발톱 깎아준다고 ‘감사합니다’ 말을 하기를 했어? 고맙다고 돈을 주기를 했어? 못 깎아, 이제부터 안 깎아줄 거니까 모두 자기 일은 자기가 알아서 해! 깎다가 피가 나든 말든 난 몰라~ㅅ

  나의 2차 일장 연설의 요지는 이러하였다.


  속사포 같은 내 말에 가족 모두는 일동 기립, 부동자세에 안면마비와 무호흡 상태에 빠진 듯했다.


출처: 그라폴리오
   오냐오냐하니까 오양골로 가고*
가만가만 있자니 가마니로 보이나

  이제부터는 ‘배가 불러서 발톱이 안 보인다고, 자기가 좀 깎아주면 안돼?’ 라는 앙탈은 통하지 않을 것이다. 결혼한 지 20년이다. 신혼이 아니란 말이다. 콩깍지는 진작에 벗겨졌고 도끼눈만 남았다.


  이제부터는 ‘손톱만 봐도 떨려. 무서워서 정말 못 깎겠어요’ 라는 엄살도 통하지 않을 것이다. 15살이다. 전혀 귀엽지가 않은 나이란 말이다. 보호본능은 이미 사라졌고 절치부심만 남았다.


  이제부터는 ‘그냥 놔둬, 깎을 때 되면 깎을게. 불편하지 않아’ 라는 인내력을 시험하는 말도 통하지 않을 것이다. 18살이다. 보는 게 불편해서 내가 깎아주겠다고 먼저 팔 걷어붙이지는 않을 것이다. 참을 인 3개만 기억할 것이다.


  이러하건대, 오늘부터 나는 너희들의 손톱과 발톱으로부터의 독립과 자주민임을 당당히 선언 하노라. 엉겨 붙는 자들은 가라!

나는 독야청청, 흔들리지 않고  손톱과 발톱만 깎을 것이다.


  Dreams come true.




•표지 사진 출처: 그라폴리오

*) 오양골: 엉뚱한 길 혹은 나쁜 길(강원도 방언). 강원도 춘천에 실제 오양골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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