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황병기 님의 '비단길'을 찾아들었다. 첫 현대 가야금 곡인 '숲'을 시작으로 '침향무(沈香舞)' '비단길' '미궁(迷宮)' 등 주옥같은 가야금곡을 잇따라 듣고 나니 마음이 다시 잔잔해졌다.
이번 추석 연휴는 여느 해에 비해 조용하였고 번잡하지 않았으나 음식을 준비하고 시댁을 찾아가는 일은 다를 바 없어 지난 토요일부터 시작된 5일간의 휴일은 정신없었고 피곤하기는 매한가지였다. 그러나 내일부터 다시 일상의 루틴을 찾아야 하기에 살랑대는 바람결에 실려 가벼운 산책도 하고 음악도 들으며 정신을 가다듬은 것이다.
휴일 마지막 저녁 식사도 조용히 집에서 마무리하였다. ‘그 많은 음식들은 도대체 어디로 사라졌느냐?’ 헛웃음을 치며 기어이 삼겹살을 사 와 구워 먹고 된장찌개를 끓여 느끼한 입맛을 다스리기에 이르렀는데 모처럼의 안온한 식구들의 저녁식사 자리가 참으로 소중히 다가왔다.
가족과 마주 앉은 식탁에서는 15,000원짜리 쪽파 한 단의 경악스러운 가격도, 1kg의 육회를 한 끼에 다 해치운 무서운 저력도, 5kg의 갈비가 순식간에 사라지는 마법 같은 일도 모두 한순간의 웃음으로 사라져 없었다. 다행이었다. 넷플릭스 전 세계 2위라는 어마어마한 기록을 세우고 있는 <오징어 게임>이 13년간 제작자와 투자자를 찾지 못해 대본이 묵혀 있었던 이야기도 나누었다(청불이라 나와 남편만 보았다). 세상에 빛을 보게 된 것도 다행스러운 일이라며 감상평도 늘어놓았다.
그러나 바야흐로 이야기는 흘러 흘러 핸드폰에 서로의 이름이 어떻게 적혀있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시작되면서 저녁식사 자리는 '폭소 대잔치'로 바뀌게 되었다.
"아들, 언뜻 보니까 아빠가 보쌈이라고 돼 있는 것 같은데, 왜 그런 거야? 바꿔주면 안 돼? 이상해..."
"어느 날, 누나가, 아빠가 옷 벗은 모습이 보쌈을 닮았다고 하잖아, 너무 낭만적이다(우리 집 유행어다, 모든 게 '낭만'으로 통한다) 싶어서 그렇게 써놨지... 그러니까 살을 빼셔, 살 빼면 바꿔줄게요..."
"푸하하... 보쌈이라고? 찐빵이나 만두, 이런 것과 사촌쯤 되는 거야? 웃긴다, 웃겨! 그럼 엄마는 뭐라고 돼 있는데?"
"무쇠팔!"
"뭐, 뭐라고?"
남편의 별칭은 나는 모르겠고, 내심 나는 낭만적인 이름이 저장돼 있기를 기대했었나 보다. 실망이 컸다. 무쇠팔이라니... ‘무쇠 팔, 무쇠 다리, 로케트 주먹! 목숨이 아깝거든 모두 모두 비켜라~’ 하는 마징가 Z가 정녕 나를 일컫는 것인가! 억척 어멈, 그악스러운 아줌마, 힘만 장사인 무식한, 뭐 그런 뜻이란 말인가.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그런 의미는 아니라고 한다. 얼마 전 어깨 관절경 수술을 한 것을 두고 즉, 쉽게 얘기하자면 수술한 팔, 인조인간 로봇 개념인 것이라는 해명이다.
"야, 수술은 했지만 철심을 박은 것도 아닌데 무쇠팔이 뭐냐? 그악스러워, 예쁜 이름으로 바꿔주라, 좀 그렇다..."
"바꾸려면 돈이 좀 필요한데요...”
오호라, 이 녀석이 엄마 아빠를 들었다 놨다 하는 것이렷다, 이번에는 호락호락 넘어가지 않겠어.
"그럼, 말아, 안 바꿔도 돼. 내 체면보다 그렇게 쓴 너의 인격을 의심받을 거니까 상관하지 않겠어!”
우리 가족은 서로를 어떻게 핸드폰에 저장해 놓았을까?
그래서 말이 나온 김에 서로의 이름을 핸드폰에 어떻게 저장해 놓았는지를 밝혀보기로 했다. 이건 제법 중요한 것에 해당했다. 내 생각으로는 최소한 그러했다. 심각하게 여길 정도는 아니지만 '내가 너에게, 네가 나에게, 어떤 모습으로 비치는가?'에 대한 이야기기도 하기 때문이다.
남편의 핸드폰에는 온통 '사랑하는~'의 아부성 형용사로 시작하는 무리들이 단축번호 1번부터 십몇 번까지 도배되어 있다. 이른바 '패밀리'에 속해 있는 사람들이다. 사랑하는 이쁜이를 시작으로 사랑하는 모친, 사랑하는 장모님부터 사랑하는 조카 OO까지... 아무도, 누구도 기분이 나쁘다거나 좋다거나 토를 달기 애매한 말이면서 붙인 사람으로서는 No1, No2, No3...처럼 ‘안전 제일주의’에 입각한 이름 붙이기 수법 되시겠다. 얕은 잔꾀가 깔려 있으나 고루하고 진부하다.
내가 붙여 놓은 별칭들도 재미없기는 마찬가지다. 게다가 6~7년 동안 고정 판박이다. 한 번 붙여놓으면 하늘이 무너지지 않는 한 바꾸는 성격이 아닌지라 유행에 뒤떨어지는 것은 물론 센스마저 꽝인 이름들이다. 아들의 이름을 ‘와조스키’로 해놓은 것만 봐도 그렇다. ‘몬스터 주식회사’ 영화가 20년 전에 나왔고 5~6년 전, 영화를 다시 보면서 캐릭터 중 ‘와조스키’가 마음에 든다 하여 저장해 놓은 것이었다.
남편의 이름은 또 어떻고. ‘미스터 고'는 고씨 성에 일반적인 남성을 표시하는 '미스터'를 붙인 단순한 구조를 가지고 있는데 '오빠'라고 불리고 싶다는 남편의 의사를 그나마 반영한 이름이다. 5살 연하남에게 ‘오빠’는 좀... 손발이 오그라들 일이지 않은가 말이다. 꿈도 꾸지 마시라, 미스터 선샤인도 있으니...
그러나 아이들은 이름 붙이기를 유행에 따라, 상황에 따라, 생각나는 대로, 자유롭게, 재미있고도 유니크하게 그때그때 바꾸는 모양이었다.
사실, 이름, 별칭, 별명 등은 많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어 함부로 지어 부르면 안 되는, 조심스러운 것에 해당됐다. 불리는 순간, 그 사람의 외형과 성격, 느낌과 인식이 자연스레 연상되고 각인되기 때문이다.
별명이란 모름지기 듣는 쪽에서 우월감을 느껴서는 재미가 나지 않는 법이다. 듣는 쪽에서 열등감을 느끼고 부르는 쪽에서는 악동 기질적인 쾌감을 느끼는 것이 별명이다. (이외수의 '칼', P46)
그러나 핸드폰에 저장돼 있는 각자의 이름은 이름보다는 별명에 가까운 것이 아닐까 하여 ‘뭐, 아무려면 어때?’ 하는 만만한 생각도 들었다.
“핸드폰 이름은 불리는 게 아니라 자기 혼자만의 상상에 기인하는 거니까 별명처럼 독특하면서 재미있는 것도 나쁘지 않겠어. 그런 의미로 본다면 아빠 이름이 가장 재미있네...”
분위기 파악도 못하고 나는 그만 화를 자초(自招) 하고 말았다.
결국, 대화의 끝에 남편은,
"내이름이제일이상한것같아, 섭섭해! 상처받았어!!!" 라며 토라져 버렸다.
이를 어쩐다, 웃자고 한 얘기에 죽자고 하니 난감할 따름이다. ‘미스터 고’를 ‘OO 오빠야’로 바꿔준다고 해야 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