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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소운 Jul 09. 2021

곰배령을 가다

우중산행, 사랑고백 그리고 농무 삼매(濃霧三昧)

   오후부터 내린다는 비는 오전부터 성급히 내리고 있었다. 차창에 한 방울씩 내려 꽂히는 빗방울을 보며 나는 생각했다. 우중雨中 산행이라니...


   강원도 양양의 한 펜션에 도착해 우의를 덧입고 곰배령 입구에 도착했을 때까지도 반신반의했다.

 ‘올라갈 수 있을까?’

그러나 막상 도착해 보니 등산객들은 ‘뭐, 이쯤이야!’한 치의 망설임 없는 얼굴로 매표소를 통과해 산으로 향했다. 우의를 입지 않은 사람도 많았고 6~7살이나 될까 싶은 어린아이도 있었다. 머리카락이 희끗희끗한 노부부의 모습도 보였다. 가랑비 정도의 비로는 우리를 막을 수 없다고 말하는 듯했다. 무조건 올라야 한다는 사명을 띤 얼굴 표정도 얼핏 스쳤다. 못 가겠다는 핑곗거리를 찾을 수 없었다.


   1,146m 곰배령 정상까지 왕복 4시간. 비교적 완만한 코스라 남녀노소 막론하고 쉽게 오를 수 있다고 알려져 있지만 곰배령(嶺) 역시 한계령, 대관령, 미시령 하는 말 그대로 높은 산의 고개를 말하는 것이니 오르기 쉬울 턱이 없다. 게다가 백두대간의 등뼈에 해당하는 곳이 아닌가.


   그렇지만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여기 온 이상 무조건 올라가야 하는 것이란다. 닥치고 우중 산행 시작!


   땅! 시작의 총성과 동시에 남편 등산화 밑창이 떨어져 나갔다.

맙•소•사,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난감한 상황이었다. 요 정도 등산에 시베리아 등반할 것 마냥 등산화에 등산복, 장갑, 폴대까지 챙길 일 있냐는 나의 폭풍 잔소리를 들으면서도 기어이 고집하며 신은 등산화였다. 한 때는 회사에서 산행이 잦아 뻔질나게 신던 등산화였지만 회사를 옮긴 이후에는 한 번도 신지 않고 신발장에 고이 모셔만 두었던 것이었다. 등산화 구입한지도 7년이 넘었으니 가만히 놔둬도 어디 한구석이 삭아 떨어질 판이었다.


   기회는 이 때다 싶어 올라가지 말자고 했다.

 “비도 오는데... “ 말 끝을 흐렸다. 짜증도 냈다. 거봐, 내가 뭐랬어, 등산화 신지 말라고 했어 안 했어하면서.

괜찮다고 했다. 그러나 괜찮지가 않은 일들은 계속되었다. 얼마 가지도 못해 다른 쪽 밑창도 공평히 떨어져 나갔다. 고무 밑창 없는 신발은 발아래 돌들로부터 발을 보호받지 못한다. 맨발로 걷는 것과 같은 충격이 전해질 것이다.

5km나 올라갔을까? 나머지 밑창이 덜렁거리는가 싶더니 급기야 발이 드러났다. 흙탕물에 젖어 양말인지 밑창인지 구분하기도 힘든 처참한 상태였다.

비는 계속 내리지, 우비는 몸에 척척 달라붙어 땀복이지, 마스크는 답답하지, 안경은 내 호흡과 열기로 희뿌윰하지, 다리는 말을 안 듣지 그리고 내려가자 하는 말은 들을 생각을 않지.


가방에 들어있던 비닐로 임시방편, 꽁꽁 싸맨 발. 차라리 짚신이 더 낫지 않았을까?(상), 이끼로 덮힌 나무와 주황버섯(아래,좌), 숲 바닥을 차지한 활짝 핀 고사리(아래,우)


   신발이 더 이상 벌어지지 않도록 등산가방에 여러 장 있던 비닐을 뜯어 씌우고 두르고 묶어서 맨발로 걷게 되는 일은 최소한 막자고 안간힘을 썼다.

첩첩산중, 점입가경이라, 쌓이는 위기의 순간에도 임기응변, 돌파구는 찾아지는 법이었다.

비닐마저 헤지면 입고 있던 우비의 한쪽 팔을 뜯어내자 했다. 그것도 안되면 또 한쪽 팔을 뜯고...

 “가제트 만능팔이야, 이게?...”

피식 새어 나온 웃음은 우려와 걱정이 앞선 헛웃음으로 변했다.


   발이 물에 젖어 퉁퉁 부었을 것인데,

 “곰배령에 오르려다 완전 곰발바닥 됐네”

너스레를 떤다. 혼자였으면 시작, 하면서 바로 포기했을 텐데 나 때문에 계속 올라가는 것이라 했다.

 “굳이 그럴 필요 없는데...”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해내는 멋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서란다. 든든하게 항상 옆을 지켜주는 ‘영원한 애인’이고 싶다고 했다. 뜬금없는 사랑고백에 바람도 울고 갈 일이 아닌가. 나는 괜스레 얼굴에 떨어지는 빗방울을 닦아냈다.



   우여곡절 끝에 우리는 산을 오른 지 2시간 반 만에 곰배령에 올랐다. 앞과 뒤를 살펴도 자욱한 안개만 가득한 정상이었다. 활엽수의 깊고 짙은 숲 그늘, 바닥을 차지한 양치식물로 온통 초록인 수림을 지나 낮은 관목지대를 건너오면 곰배령 정상은 드넓은 초지(草地)다. 산세의 모습이 마치 곰이 하늘로 배를 드러내고 누운 형상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답게 푸근히 넓다.


   곰도 사람도 드러누워 편안히 자연을 즐기라는 듯 초지를 덮은 지리터리풀, 나비나물, 노루오줌, 쥐오줌풀, 꼬리 조팝나무, 용머리 꽃 등 야생식물은 하늘 아래 넓지막한 꽃 정원을 만들어 놓았다. 곰배령 이름 앞에 ‘천상의 화원’이란 수식어가 붙은 이유이다.


   하늘 맑은 날, 곰배령에 올라 뒤를 돌아보면 백두대간 너머로 웅장하게 치솟은 설악산 대청봉과 중청봉이 보일 테지만 사방이 보이는 것 없이 안개뿐인 산 정상은 안개의 바다요, 시선 머무는 그 어디쯤이 수평선이 된다.


곰배령에 올라

곰배령 너른 품에 구름이 안겼다.
들풀도 까무룩 선잠에 취했으니
객들은 그저 조용히 머무르다 갈밖에

(곰배령의 농무에 취해 시조 한 수 짓다)


  여기서 모든 것은 낮아진다.

높이 오르는 것 없이 낮아져야 한다. 구름마저 낮게 깔리어 안개가 되고 안개는 들풀 사이사이 스며들고 젖어 들어 겸손해지고 공손해진다.

어느 하나 자신을 드러내어 내세우거나 자랑하지 않는다.

 ‘낮은 자세로 임하여라’

우우웅... 우우웅...

바람만이 경구를 전하고 파도처럼 밀려왔다 대지를 훑고 지나갈 뿐이었다.


곰배령을 오르며 가장 많이 본 지리터리풀꽃, 곰배령 정상에서도 만나다(좌), 산 초입에 홀로 피어있던 노루오줌꽃(우)


   하산하는 길은 산을 오르는 것보다 쉬웠으나 무엇보다 발이 고생한 하루였다. 산을 내려와서는 미련 없이 등산화를 버리고 맨발로 숙소로 돌아왔다.


  바비큐 한 상을 차려놓고 밤늦게까지 쏟아지는 비를 바라보며, 빗소리를 들으며 잠을 이루지 못했다.


   밤새 양양에는 억수같이 비만 내렸다.

내 마음 속에선 곰배령의 농무가 파다했다.







*) 곰배령은 유전자 보호림 관리와 산불 예방 차원에서 부분적으로 입산을 통제하거나 탐방 인원을 제한하므로 사전에 인제국유림관리소(033-463-8166)에 탐방 신청을 해야 오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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