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날 모래바람(黃沙)이 검붉은 어스름과 바람을 만나 자욱하게 하늘을 덮고 이리저리 몰려다닐 때가 있다. 곧 큰 바람이 불어올 거라는 조짐이다. 하늘 위로 무섭게 끓어오르는 붉은 모래바람을 올려다보며 국운을 점치는 점성술사처럼 나는 이렇게 중얼거리곤 했다. ‘적사(赤沙)의 귀신이 몰려온다’… 그것은 역병이 창궐한다는 흉흉한 소문이나 환란이 들이닥칠 거라는 불안 같은 것과 이어져 있었고 서둘러 집으로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했다.
석연치 않은 붉은 기운. 모래바람이 이는 봄이 아니었음에도 붉은 모래바람은 불었다. 1986년 10월 30일, 정부의 북한 금강산댐 건설계획 발표가 터져 나왔다. 85년 86년은 대통령 직접 선거와 개헌 요구의 압력이 대학가를 중심으로 고조되고 있을 때였고 그날은 대대적인 시위가 예고되었었다. 사실 붉은 모래바람을 일으켜 천지를 덮는 작전은 잊을만하면 한 번씩 소환되는 관행 내지 습성 같은 것이었는데 다만 그 전에는 깨닫지 못했던 것이었고 그때는 인식하게 되었기에 알게 된 것이었다.
몰랐던 시절, 유년에는 학교 화단에 세워져 있던 이승복 어린이 동상과 ‘공산당이 싫어요’ 외침에 불쌍한 마음이 들었고 ‘멸공’이라든가 ‘반공’이라든가 하는 담벼락에 새겨진 글귀에 화답이라도 하듯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태극기가 바람에 휘날리는 것만 보아도, TV 방영의 시작과 끝에 애국가가 울려 퍼질 때도 가슴이 괜히 웅장해지기까지 했다. 무찔러야 할 대상은 북한 괴뢰와 김일성이 정답이었고 국가안보를 위협하는 반동분자들은 타도의 대상이었다. 국가 이념에 반하는 생각과 말은 '쥐도 새도 모르게 어디론가 끌려가는 일'이어서 쉬쉬했고 견제를 받는 일이었다.
그러나 1986년 가을 무렵, 당시 고등학교 3학년이었던 나와 친구들은 우리를 둘러싸고 있던 ‘반공’이라는 온실 세상이 거짓이라는 사실을 희미하게나마 알기 시작했다. 우리는 모든 것이 ‘쇼’라는 말을 남기고 첫사랑 ‘실비아’를 찾아 피지 섬으로 떠나기로 결심한 트루먼이 되어가고 있었지만 거대한 이데올로기로 눈과 귀를 막았던 권력 세력들은 그것을 알지 못했던 것일까?
그래서 11월의 어느 날, 운동장에 서있었던 나는 부끄러웠다. 부끄러움은 온전히 나의 몫이었다. 누구도 대신 부끄러워해줄 수 없었고 함께 나눌 수도 없는 부끄러움이었다. 오히려 부끄러움은 계속 양산되는 중이었다. 아침 조례도 아닌 점심시간을 앞둔 정오 무렵이었다. '전교생 모두 운동장으로 집합하라.'는 교내방송을 듣고 우리는 하나 둘 운동장에 몰려나와 줄을 맞춰 섰다. 아침 조례시간에 담임으로부터 오후에 궐기대회인지 규탄대회인지를 한다고 들었기에 무슨 일인지에 대해 굳이 묻지 않았다. 중앙 교단 옆으로 '제2의 남침, 금강산댐 건설을 즉각 중단하라!'는 플래카드가 걸려 있었고 짜인 시나리오 각본대로 전교 회장과 부회장은 리허설 중이었다. '결사반대'라고 적힌 머리띠도 두르고 있었다. 운동장에 모인 우리의 역할은 뻔했다. 금강산댐 건설 반대 궐기대회에 강제 동원된 전시용 들러리. 노임 한 푼 받지 못하는.
내 옆에 서 있던 진아, 옆 반의 별이, 그리고 뒤에 열을 맞춰 서 있던 친구들. 수업을 하지 않고 놀 수 있는 그 시간이 분명 좋았을 텐데 다들 투덜대고 있었다. 서로의 얼굴을 힐긋거리며 겸연쩍은 미소를 짓다, "아, 짜증 나, 도대체 이게 뭐야?" 불만을 터트렸고 "아이씨, 쪽 팔리구로..." 말 끝을 흐렸다. 마이크를 잡지 않았는데도 구호 연습에 한창인 부회장의 목소리는 운동장에 쩌렁쩌렁 울려 퍼졌고 규탄대회의 당위성과 입장을 읽어나가는 회장의 목소리, 줄과 열을 맞추라는 선도반 선생님의 호루라기 소리, 목소리가 작다고, 주먹을 높이 치켜들지 않는다고, 줄이 삐뚤다고, 잡담을 한다고 리허설은 오래 계속되었다. 와중에도 우리의 쑥덕공론은 은밀히 이어졌다.
“긴데 말이디, 그게 진짜 같이 들리네? 금강산댐이 무너지면 말이디 200억 톤의 물이 밀려와서리 서울을 물바다로 만들어버린다는 거 말이야.” 나는 그것이 알고 싶었다, 뉴스를 통해 들은 그 말의 진실과 다른 사람들의 이해의 여부가.
“핵폭탄 저리 가라 한다잖네, 남한으로 쳐들어 오기 위해서 말이디, 기럼 우리 다 죽는기야, 알간? 모르간?”
"기럼, 너는 그걸 믿는다는 거 아이네."
“88 올림픽을 방해하려는 북한의 공격이라잖네.”
"금강산댐이 지어지지도 않았는데 무슨 공격이네? 생각 좀 하고 살라, 동무"
“이런 종간나 새끼들! 우리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기 위해 평화의 댐을 건설하자는 거 아니네. 성금도 내놓고선 무슨 잡소리가 많네. 길티 않으면 자아비판 시키갔어!"
"길티, 하라믄 하고 까라면 까야지, 별 수 있네? 나는 규탄대회 못하갔시오, 해보라우. 욕을, 욕을 바가지로 먹을거이야. 날래 날래 하고 끝내버리자우. 짜증나는거는 빨리 끝내는 게 신상에 좋은기야."
그때 우리는 권력과 진실이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는지, 어떤 것이 진실인지 알아보고 판단하기 쉽지 않았다. 뉴스나 신문 혹은 어른들의 말은 편협된 것이었고 어떠한 생각이나 판단도 요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까라면 까야지 별 수 있네? 친구의 말이 진리였던 때였다.
우리는 '굳이 이렇게까지 해야만 했냐? 얼마면 되는데?'의 심정으로 목청껏 외쳐댔다. 선생님들이 판단하기에 이만한 함성소리면 됐다 해야 이 규탄대회는 끝나는 것이었기에 우리는 있는 힘껏 결사반대를 외쳐야 했다. 부끄러움이 커질수록 외치는 구호 소리는 커질 수밖에 없었다. 바락바락 달려들어 치고 차고 물고 뜯고 쌈을 하는 싸움닭처럼.
“북한은 금강산댐 공사를 즉각 중단하라!” "금강산댐 건설을 결사반대한다!"라고 부회장이 선창을 하면,
“중단하라, 중단하라!” "반대한다, 반대한다!" 전교생이 외쳤다.
규탄대회는 결의에 찬 자발적인 집회 같아 보였다. 모래바람이 불던 운동장에서 구호를 외치던 우리의 그날, 우리는 개별적이고 독립적인 인간이라는 존재가 아니었고 앵무새에 지나지 않았다.
흔히, 5,60년대를 살아온 아버지 세대를 국가 재건, 경제부흥의 역군이라 부르고 7,80년대를 살아온 우리 세대를 민주화의 주역이라 표현한다. 그러나 나는 86년 금강산댐 규탄대회날도 87년 6월 항쟁 때도 주체적 역할을 하지 못했으므로 부끄러웠고 당시를 떠올리는 지금도 부끄럽다.
평화의 댐 건설에 오천 원을 낸 것을 '속았다'고 면피하기에는 나의 부끄러움의 실체는 크고도 크다.*)
*) 웹툰 <신과 함께> 저승편의 주인공 김자홍이 거해지옥에서 남에게 속은 일이 있으면 이야기하라고 할 때, 진기한 변호사가 '1986년, 평화의 댐 건설에 오천 원을 냄’이라고 답해 재판하는 대왕이 '거해 지옥 도감에 실린 사건이었지'라고 말한 것을 차용함.